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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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마터면 절필을 할 뻔했다. 절필을 하고 싶었다. 당해낼 수 없을 만큼 좋은 글을 만났기 때문이다. 간사한 마음이다. 거장의 반열에 드는 글쟁이들의 글을 읽을 때는 들지 않는. 닿을 듯 닿지 못할 것 같은 필력을 글을 읽어야 드는 그런 마음.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나 혹은 글쓰기를 좀 즐긴다는 사람들의 빼어난 문장을 보면 언제부터인가 탁 하고 끈을 놓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욕심은 나는데 자신은 없어서다. 한때는 닮고픈 글들을 보면 힘이 나곤 했었다. 어떤 이유로 이렇게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튀기는지 알 듯 하면서도 도무지 모르겠다. 이런 괴상한 직접적 심정들을 뒤로하고 훌훌 떠나버린 언니는 '내가 이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더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봐 괴로웠다는 식으로 회고했다. 그런 순간들이 내게도 찾아온다. 부쩍 빈도가 늘어난 지가 벌써 오래다. 그런데도 미동을 않고 있다. 나약함의 또다른 표출 방식이다. 발만 동동 구르게 된다. 동동 구르던 발 밑의 지반이 자꾸 약해지면 어느날 갑자기 흔적없이 끝없는 심연 속으로 허물어져내릴 것 같다. 겁이 난다.

죽여주는 여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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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주는 여자   The Bacchus Lady, 2016 드라마 한국 111분 2016 .10.06  개봉 이재용 윤여정 (소영),  전무송 (재우),  윤계상 (도훈)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니에요! 왜 이런 거 찍어? 돈 되는 거 찍어. 나처럼 늙어서 개고생하지 말고. 안 도와줘도 돼요. 돈 내줄 것도 아니면서.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아무도 진짜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차라리 잘됐네. 양로원 갈 돈도 없는데. 올 겨울은 안 추웠으면 좋겠네.  =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니에요." 오갈데 없는 코피노 소년을 본능적으로 거둔 박카스 할머니와, 한쪽 다리가 없는 성인 피규어 제작자에게는 어떤 악의가 없다. 아마 이주여성지원센터 관계자는 규정상의 이유로 난색을 표했겠지만, 습관처럼 도훈 입에서는 결백을 주장하는 말이 튀어나온다.  가슴이 아팠다.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 이상한 사람들도 아닌데, 곁눈질로 쏟아지는 싸늘한 시선을 당연하게 일상적으로 받아냈을 사람들. 그래서 위축된 마음이 알게 모르게 외마디 말로 쏟아진 것은 아니었을까.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면 모두 정상이 아니다. 닫힌 세상의 기준으로 그렇다. 집주인은 3류 트렌스젠더바에서 노래를 하는 트렌스젠더 가수 티나. 세입자는 셋이다. 하나는 양공주로 살다가 이제는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박카스 할머니 소영이고 하나는 무릎 밑으로 한쪽다리가 없는 청년 도훈이다. 그는 방에 틀어박혀 성인 피규어를 만드는 일을 한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마트 아르바이트를 하는 흑인 여성 까밀라다. 거기 '주워 온 코피노 아이' 민호가 합류한다.  대한민국 사회의 낮고 차가운 구석 곳곳에 내몰려있는 약자들이란 점에서는 비슷하다. 제각기 상황과, 살아온 이야기가 다른데도 한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4등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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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등 4th Place, 2015 드라마 한국 116분 2016 .04.13  개봉 정지우 박해준 (광수),  이항나 (정애),  유재상 (준호) 4등?! 너 때문에 죽겠다! 너 진짜 뭐가 되려고 그래? 너 꾸리꾸리하게 살 거야 인생을? 형, 1등하면 기분이 어때요? 니 없으면 딴다. 형이 다시 수영했으면 좋겠어! 엄마가 이젠 나만 괴롭히잖아. 수영이 너무 좋은데, 수영을 하려면 1등을 해야 하니까요. 넌 엄마만 없으면 1등 할 수 있다.  = 비뚤어진 교육열의 맨얼굴을 담백하게 담아냈다.  눈먼 엄마와 때리는 코치 사이에서 시달리는 준호도 불쌍하지만, 과연 한때 천재 소년이었던 광수코치도 가엾다. 방황하는 광수에게 필요한 방식의 교육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광수야 말로 맞고 나서 버텼다면, 계속 재능을 펼칠 수 있었을까? 일등을 향해 질주하는 준호를 아래서부터 잡아낸 수중 와이드샷이 압도적이었다. 억눌렸던 꿈이 만개하듯,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  수영을 포기한 이후 레인을 어지럽히며 불 꺼진 수영장 밑바닥을 헤집고 다니는 준호를 담아낸 고요한 시선도 마음에 들었다. 

문태준, 바닥

바닥 문태준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 어디로 향해도 마음은 그저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계절. 시를 읽기가 좋은 바람이 분다. 마음의 각질들이 부슬거리는 것도 오로지 날씨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두 대륙이 사랑한 도시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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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라타 탑이 보인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누빌 수 있는 유람선. '부디 내 인생에 두번째 터키가 있었으면 좋겠다.' 2014년 11월 겨울 휴가를 마치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터키의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한동안 빠져나오기가 힘이 들었다. 수천년의 고도 이스탄불의 왁자지껄한 화려함도 좋았고 어디로 눈을 돌려도 절경 뿐인 카파도키아의 우아한 척박함도 압도적이었다. 새하얗게 반짝이는 파묵칼레에서는 정말 더할 나위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번째 터키는 예상보다 일찍, 뜻밖의 기회로 찾아왔다. 별로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IS 테러니 군부 쿠데타 미수니 해서 온통 국제면을 장식한 뒤였으니까.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고 했다. 그 어느때보다도 헐값에  터키 구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말들도 나오는 때였다. 나의 임무는 만연한 불안을 달랜 뒤 돌아선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터키로 붙잡아매는 일이었다. 갑자기 떨어진 출장에 전후 사정으로 미뤄보아 여러모로 안 가는게 이득이었지만, 오로지 터키라서, 터키이기 때문에 그래도 갔다. 탁심광장. 붉은 깃발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 일이다. 적어야지 적어야지 하던 게 많이 늦어졌다. 내가 다녀간 뒤로 터키는 다사다난한 일을 숱하게 겪었다. IS, 테러, 쿠데타, 새로운 독재. 국제 뉴스로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한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던 이 나라가 생생하게 떠올라 눈이 시렸는데. 내가 다녀오고, 여행 기사를 출고하고, 조금 그 며칠을 잊었을 동안 터키는 꽤나 평온했었다. 그런데 지난주에 다시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인근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면서 국제면 뉴스 거리가 됐다. 더 늦으면 영영 적지 못할 것 같아 뒤늦게 사진을 추려서 아무거라도 적어놓기로 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탁심 광장을 지나가는 엄마와 아이들. 변화 아닌 변화는 눈에 띄게 늘어난 국기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워낙에 이 나라가 국기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The Course of Love) 알랭 드 보통/김한영 옮김/은행나무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p.16 러브스토리는 누군가 우리를 다시는 보지 않으려 할까 봐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항상 보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그들이 도망갈 수 있는 기회가 도처에 널려 있을 때가 아니라 평생 서로의 포로가 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나눌 때이다. ... 우리는 러브스토리들에 너무 이른 결말을 허용해왔다. p.27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마치 뜻 모를 밤의 언어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것 같다. p.44 쾌청한 밤에 온 우주가 그들을 맞으러 내려왔다. 그녀는 안드로메다자리를 가리킨다. 비행기 한 대가 에든버러 성 위를 넘어 착륙을 위해 공항으로 직행한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이 사람이 함께 늙어가고 싶은 여자란 느낌이 확실해진다. p.59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p.116 두 사람 모두 친밀해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마음이 아플 수 있지만 그로 인한 어떤 결과로부터도 안전하다. 그들은 결코 분개할 필요가 없으며, 계속해서 서로를 좋은 마음으로 생각할 것이다. 미래가 없는 사람들만이 그럴 수 있듯이. p.209 결혼: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p.237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이다. ...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

또! 오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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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해영(tvN) 울어도 되나요 -난 안 죽어요. 내가 요즘 가장 원하는 게 죽는 건데, 내가 원하는 건 안 이뤄지거든요. 그니까 난 안 죽어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인연 -여자는 아무리 취해도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해요. 술이 떡이 돼도 안 해요. 아무 상관 없는, 두번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면 모를까. 우리 아무 상관 없는 사이 될래요? -어떻게든 그냥 살아요. 피투성이라도 그냥 살아요.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야. 살고 싶을 땐, 사랑하기로 -학교 때 오해영이 둘이었어요. 다른 오해영은 되게 잘 나갔어요.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도는 줄 알았는데 걔 옆에만 가면 그냥 들러리. 근데 만약에 내가 왼전히 사라지고 걔가 된다면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나 걔가 되기로 선택할까? 안 하겠더라고요. 난 내가 여기서 좀만 더 괜찮아 지길 바랐던 거지, 걔가 되길 원한 건 아니었어요. 난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 되길 바라요. 여전히.. -누가 나한테 말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결혼 전날 차인 거, 아무 것도 아니라고. 끝까지 말 안해주네. 참 매정하다 -그게 어떻게 아무 것도 아니야? 세상이 나한테 사망선고 내린 기분, 우주에서 방출된 기분, 쫓겨난 우주에서 아양 떨면서 빌붙어 살아야 하는 기분. 그게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야? 난 결혼식 당일에 차였어. 한 대 맞고 쓰러진 거야. 좀 쉬었다가 일어나면 돼. -별 일 아니라는 말보다, 괜찮을 거란 말보다, 나랑 똑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백배 천배 위로가 된다. 생각해보면 '다 줄 거야' 하고 원 없이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항상 재고, 맘 졸이고, 나만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걱정하고. 이젠 그런 짓 하지 말자.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 만나면, 발로 채일 때까지 사랑하자. 꺼지라는 말에 겁 먹어서 눈물 뚝뚝 흘리면서, 조용히 돌아서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다시 하지 말자. 꽉 물고 두드려 맞아도 놓지 말자. 아낌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