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적성인 게시물 표시

슬럼프

장황하고 두서없는 헛소리. 술은 늘 글을 부른다. 1 이처럼 모든게 어렵게 느껴진 시절은 없었다.견줄 만한 때를 꼽으라면 고3 봄 첫사랑과 헤어졌을 그 시간들이려나. 너무 어렸던 나는 어디선가 주워본대로 멍청하게 소주병 나발을 불고 전봇대를 들이받아보기도 했다. 여기저기 기대어 꺽꺽 울며 별의 별 진상과 추태를 다 부려봤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깊이의 관계였지만 열여덟의 나에겐 그가 평생에 한번 만날 법한 소울메이트로 느껴졌기에 그 분리를 견딜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대입이 삶의 전부처럼 왜곡돼 보이던 그 나이의 나에겐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있는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한심하기도 했다. 지금은 되려 그때의 미숙한 순수가 스스로 귀여워 보이거나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그 사이 8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내게는 그 나날만큼 켜켜이 굳은 살이 배겼다. 좀 더 중요한 일들이라던지 그래도 끝내 챙겨야만하는 의무랄 게 생겼다. 스물다섯의 나는 지난 사랑이 한낱 몇 병 술따위론 씻겨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슬픈 노래 가사의 클리셰들을 경험으로 체득했고 습관처럼 듣는 그 노래들이 결코 상한 마음을 치유하진 못한단 점을 안다.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가기에 숱한 상처를 봉합하는 일은 시간과 망각의 일이란 것을 안다. 방금 나를 떠나간 사람이, 혹은 내가 방금 떠나온 사람이 생의 마지막 인연은 아닐거라는 점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무던해지기 위한 사투를 이기지 못하고 백기를 든다. 지나간 사랑을 넘어설 마음을 일으키지 못할까봐 겁에 질린다. 그런 나를 상대가 우습게 알까봐 두려워 가슴속은 곪아든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 어른이 되는 괴로움은 거기서 시작된다. 2 모든게 엉망진창으로 변한 채 연휴가 끝났다. 오랜 벗들을 만나 사는 얘기를 나누고 집으로 가는 길, 사람들은 늦은밤 막차의 빈틈을 빼곡히 메웠다. 그리고 문득 이 모두가 어느 수준 이상의 책임을 수반한 사랑의 결실들이라는 생각이 나를 압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