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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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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날개로 날아와 한동안 머물던 너를 버스에 데리고 탈 수는 없어서 황급히 쫓아보냈네 여름이 끝나버렸네 2019. 08. 31.

혼자 살아보니 몸의 소리가 들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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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아보니 몸의 소리가 들리더라 나이 서른이 가까워 올 때 세대주가 됐다.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이 있는 ㄱ시와 정확히 반대편에 있는 ㅅ시에 두번째 직장을 얻게 된 덕분이었다. “딸, 굶어 죽는 거 아니니?” “쟤가 사람 사는 꼴을 갖추고 지낼 수나 있을까 몰라.” 신이 나서 부리나케 집을 구하고 번갯불에 콩 굽듯 이사를 마친 딸의 생존을, 부모님은 걱정하셨다. 그 우려들은 효력이 없어 보였다. 가족을 떠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기숙사 생활이었지만 고등학교 3년을 ㅇ시에서 보냈다. 스물두살에는 역시 학생용 공동주택이긴 했지만 유럽의 아기자기한 소도시에서 제법 건강하게 1년을 지냈다. 내게는 그 시간 동안 살아남은 기억이 있었다. 보란 듯이 잘 살아보겠다고 자신만만해했던 건 그래서였다. 독립은 몸까지 홀로 서는 것 내가 번 돈으로 내 이름을 건 공간에서 내 생활을 꾸려가는, 비로소 완전한 독립이었다. 독립기념일은 2017년 11월6일. 대출금으로 내가 빌린 것은 단지 공간이 아니라 시간과 편리, 그리고 자유였다.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구석구석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장소가 생기는 데서 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며칠간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자유 앞에 나는 맹세 같은 결심을 했다. 모든 여유를 오로지 나를 위하는 데 쓰기로 말이다. 첫번째 관리비 고지서가 날아오기도 전에 이것저것 많이도 벌였다. 중국어 학습지를 열심히 풀고,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책 읽는 모임에 가입하고, 수시로 영화를 보면서 이런저런 글을 썼다.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시나브로 취하고 있었다. 혼자 사는 게 마냥 쉬울 리 없었다. 새로운 방식의 삶은 내가 머리와 가슴을 채우는 데만 집중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때를 맞춰 빨래와 청소를 해야 했다. 생필품과 식재료의 종과 양, 나의 잔고를 헤아려 장을 봐야 했다. 음식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해야 했으며, 아픈 몸도 직접 돌봐야만 했다. 모든 것이 당연했지만, 거의 처음이기에 어느 것 하나 자연스럽지

더 브레인, 데이비드 이글먼

더 브레인 The brain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전대호 옮김/ 해나무 우리가 우연히 속하게 된 세계가 조각상을 깎듯이 우리를 다듬는다. p. 18 물리학적으로 보면, 당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당신이다. 다행스럽게도 다양한 당신의 버전들 모두를 연결해주는 상수가 하나 있다. 바로 기억이다. p. 34 요컨대 어느 순간이든 우리의 시각 경험은 눈으로 들어오는 빛보다 머릿속에 이미 있는 것에 더 많이 의존한다. ... 심지어 외부 데이터로부터 격리되어 있을 때에도 뇌는 계속해서 나름의 광경들을 산출한다. 세계를 없애버리더라도, 쇼는 계속된다. p. 77 실재 세계는 풍부한 감각적 사건들로 가득 차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뇌가 손전등으로 대상을 비추듯이 고유한 감각 능력으로 세계를 비추는 것이다. p. 86 그녀는 이른바 '공감각'을 경험하는 것이다. 공감각이란 감각들(일부 경우에는 개념들)이 뒤섞인 상태를 뜻한다. 공감각의 유형은 다양하다. 일부 사람들은 단어에서 맛을 느낀다. 소리를 듣고 색깔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시각적 운동을 소리로 감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체 인구의 약 3퍼센트가 이런저런 형태의 공감각을 경험한다. ... 공감각은 뇌의 담당 구역들, 이를테면 허술한 경계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두 구역 사이에서 일어나는 혼선의 산물이다. p. 87-88 당신의 뉴런들과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뉴런들은 상호작용하면서 거대하고 변화무쌍한 초유기체를 이룬다. 우리가 경계를 그어 당신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큰 연결망 속의작은 연결망일 뿐이다. 인류의 미래가 밝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인간의 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연구를 계속 이어가야 마땅하다. 기회들뿐 아니라 위험들도 연구되어야 한다. 우리 뇌의 설계에 새겨진 진실을 피할 길은 없으므로,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p. 227 현재 우리는 뇌가 소화할 수 있는 데이터 유형의 한계를 모르고, 그 한계가 존재하는지조차도

당분간 이사

구글 블로그에 동영상을 올리는 방법이 너무나도 번거로운 관계로 여행기를 쓰는 동안 브런치로 이사하기로했다. 다시 돌아올지 말지, 아마 여행기 작성이 끝나면 정해질 것 같다. 잠시 안녕! https://brunch.co.kr/@suminism

편리를 포기할 각오는 됐나요

편리를 포기할 각오는 됐나요 문이 열리자마자 후끈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더 이상 발 디딜 틈 하나 없어 보이는 안쪽을 향해 기어코 네댓 명이 몸을 욱여넣었다. 옷자락만큼 구겨진 얼굴들이 무언가를 보고는 이내 더 찌푸려진다. 전동휠체어다. 출근길 만원 전철 한 구석에 그게 있었다. 휠체어 위에는 모자를 푹 눌러쓴 노년의 남성이 좀처럼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열차가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자꾸만 그의 머리 위로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를 힐끔거렸다. 환승역에 다다르자 밀치듯 빠져나가는 인파 사이에서 그는 꽤나 불안해보였으며 사람들은 살짝 불편해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편리와 효율이 조금 위협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불의에는 눈을 쉽게 감고, 불편에는 눈에 불을 켠다. 그게 남들보다 수월하게 사는 비결이라고 세상은 가르친다.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것은 그저 적당한 불편이다. 소문난 맛집이라면 삼복더위에도 한 시간 넘게 줄지어 기다릴 줄 안다. 텃밭에서 찬거리를 직접 키우거나, 채식주의자를 자처한다. 2G폰으로 돌아가기도, TV를 없애기도 한다. 김용섭 칼럼니스트는 저서 ‘라이프 트렌드 2017-적당한 불편’에 ‘적당한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트렌드는 소비의 진화이자 소비자의 성숙’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적당한 불편은 대개 나를 위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나의 미각을 위해 줄을 서고, 나의 건강을 위해 기르고 걸러 먹는다. 내 피로를 덜고자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찾는다. 반면 적당하지 않은 불편은 이타적인 속성을 지닌다. 환경을 위해 분리수거를 하거나 텀블러를 쓰고, 필요한 이들을 위해 노약자석을 비워 두는 행동들이 그렇다. 준법 역시 불편 감수에 기초한다. 영국의 신학자 리처드 후커는 “불편함 없이는 변화도 없다.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도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남겼다. 견뎌야 할 불편도 습관이 들면 당연해진다. 내가 더 가져서, 더 잘나서가 아니다. 나만이 아니라 다 같이 행복하기 위해 당연하게 누려 왔던 것들

평범함의 난이도

평범함의 난이도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 누군가 당신을 두고 이런 말을 한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 있겠다. 크게는 두 갈래로 나뉠 것이다. 조금은 섭섭하거나,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거나. 잘난 것도 특별한 것도 없이 흔하다는 것, 곧 당신이 평범하다는 얘기다.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라는 문장은 형용사 ‘평범하다’의 뜻풀이다. 정의가 딱 한 줄일 뿐인 이 간단한 단어를 두고 저마다 각기 다른 모양새로, 평생 사투를 벌인다. 평범함에 대한 모순적인 욕망과 압력 때문이다. “우리 아들은 말이 유독 빨랐어.” “우리 딸은 한번 가본 길을 전부 기억하더라고.” 모든 아기들이 각양의 방식으로 비범하다. 탄생의 순간부터 자라는 내내 무엇인가 특출할수록 좋다. 상당수는 영재가 아닐까 하는 기분 좋은 오해도 받는다. 뭐라도 남다르기를 처음에는 부모가 원하고, 결국에는 자신이 한동안 바란다. 저마다 이것저것 시도하고 부단히 노력한다. 비범함을 동경해서다. 평범함은 겉보기에 누구나 갖고 있는 것 같은 특성이다. 뭇 사람들보다 더 나은 걸 누리리라 다짐하는 이들이 한때 그 소박한 축복을 얕보는 이유다. 그러나 특별해지겠다는 결심은 주류(主流)의 존재를 알게 되는 무렵부터 흔들리기 십상이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여기는 주류의 작동원리와 비범함의 본질이 부딪히기 때문이다. 충돌의 여파로 복잡한 욕망이 생겨난다. 주류에 속하면서도 조금 더 잘되고 싶은, 월등하게 평범하겠다는 의지 같은 것 말이다. 남들만큼은 해야만 할 과업들이 최후 방어선처럼 거기서 하나둘 늘어난다. 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고, 연애를 하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늙어가는 것. 남들처럼, 평범하게. 비범한 사람들은 더욱 고되고 극히 일부만 평범 이상에 간신히 이르더라는 풍문이 두런거리며 맞장구친다. 은근한 폭력이다. 대부분 사람은 세상의 아우성을 못이기는 척 일단 평범해보기로 작정하게 된다. 진짜 전쟁도 그때부터 시작이다. 별

믿는다는 것

믿는다는 것 “사랑하는 XX이에게. … 내년에도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동생과 잘 지내야 한다. 산타 할아버지가.” 산타클로스의 편지를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발견해버렸다. 그것도 아빠 책상서랍에서. 편지 속 글씨는 아무리 봐도 책상 위 메모지에 적힌 아빠 것과 모양이 같았다. 얼얼함이 정수리부터 심장을 관통해 발끝까지 찌르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아빠 책상이나 뒤적거리는 못된 애를 급습한 벌이었나보다. 내 탓이다. 하나님, 예수님과 무슨 사이인지, 천사인지 사람인지, 왜 할머니는 없는지, 산타에 대해 누구도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았는데 내가 그를 믿었다. 그래서 속았다. 기억 속에 각인된 최초의 배신이다. 여덟 살짜리 마음에는 퍽 강렬한 충격이었다. 지금도 그 편지 속 파란 활자들이 눈에 선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믿다’라는 단어의 첫 풀이는 이렇다. ‘어떤 사실이나 말을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다고 여기다.’ 마지막에는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아무 의심 없이 다른 무엇이라고 여기다’라고 적혀 있다. ‘꼭 그렇게 될 것’, ‘아무 의심 없이’라는 표현이 선포하듯 믿음은 순도 100%의 마음이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다만 믿음의 경도는 제각각이다. 작은 외부 충격에 틈을 드러내는 믿음이 있고, 온 세상이 무너지는데 꿈쩍 않는 믿음도 있다. 믿음이 깨질 때는 늘 단단함에 비례하는 통증이 찾아온다. 어른이 되는 것은 곧 조리 있게 의심하는 법을 훈련하는 일이었다. 내게 맞닿은 세상이 넓어질수록 기만과 배신의 경험은 차곡차곡 쌓였다. 그때마다 속절없이 크고 작은 마음의 성장통을 앓았다. 노력하면 된다고 믿었는데 안 되는 일들이 숱했다. 의인은 상을,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믿음이 종종 통하지 않았다. 사람을, 시스템을 쉽게 믿어선 안 됐다. 기자가 된 뒤 허다한 믿음이 엎어지는 광경을 곳곳에서 더 생생하게 목격했다. 보금자리라 믿던 곳에서 가정폭력으로 죽어나간 이들이 있었고, ‘서울중앙지검’을 사칭한 전화에 속아 전 재산을 잃

수(數)의 독재

수(數)의 독재 뇌의 어느 한 구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의심을 한 지 오래다. 두정엽(頭頂葉), 아마 여기 문제인가 보다. 정수리에서 뒤통수로 넘어가는 길목쯤에 있는 뇌의 이 부분이 맡은 역할 중 하나가 수학적 사고력이라고 한다. 나는 수학이 괴롭다. 요즘 말로 ‘수알못’(수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학문 영역까지 갈 필요도 없다. 숫자가 싫다. 수(數)가 싫다. 이 감정은 자주 호오(好惡)의 경계를 넘어 공포로 내달린다. 고작 0부터 9까지 기호 열 개의 조합일 뿐인데, 제멋대로 뒤엉켜 있는 숫자들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하고 번뜩 눈앞이 캄캄한 게 꽤 아찔하다. 피치 못하게 숫자를 접할 때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를 쓰지만 소용은 없는 편이다. 취재 과정에서 다뤄야 할 숫자가 세 자리를 넘어가면 꼭 몇 번은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통계를 바탕으로 기사를 쓸 때는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드리고 엑셀과 씨름한 뒤에도 마음이 편치 않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귀결되는 일이 잦다. ‘숫자에 트라우마가 있다’고 기회 될 때마다 미리 앓는 소리를 해 둔다. 트라우마의 역사는 중학교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출난 재능이 없으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수학과 좀처럼 맞지 않았다.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가 될 뻔했다. 그래도 대학에 가려고 버텼다. 막상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수학 답안지까지 살짝 밀려 썼다. 재수는 안 했다. 수학을 더 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그 뒤로 수와 최대한 멀어지고자 발버둥쳤다. 취업에 중요하다는 경제학이나 경영학은 한 과목도 듣지 않았다. 동생이 수학 문제를 알려달라고 하면 방문을 걸어 잠갔다. 시급이 아무리 높아도 수학과외보다는 콜센터 아르바이트가 편했다. 기자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내심 안도했다. 언론사 입사 시험은 기업 입사 시험처럼 숫자들의 상관관계나 규칙 따위를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점점 더 수 앞에서 무기력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이, 키, 몸무게

새해

그 시절의 우리와, 우리가 그리던 미래는 이제 없다. 그런데 당신이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시작했다. 나는 슬퍼졌다.

나의 첫 번째 일본,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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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번째 일본, 오키나와     남국의 복장을 한 피카츄들. 귀여워서 살 뻔 했다. 포켓몬들이 즐비하다  조금 늦은 여름휴가를 오키나와로 가기로 한 데는 여러가지 계산이 있었다. 우선은 돈 계산을 했다. 이런 저런 계획으로 돈을 알차게 모으기로 다짐했건만 잘 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를 벗어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추려진 게 태국, 대만, 일본, 베트남 정도였다. 슈리성 무료 춤 공연 첫 순서. 아름다움이 가장 강조된 춤. 다이빙을 꼭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일년에 한번씩 다니는 걸로는 매번 할 때마다 가망이 없을 거라는 불길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대만과 오키나와 정도로 목적지를 추릴 수 있었다. 틈나는 대로 대한항공 어플과 인터파크 항공 어플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야근날 밤, 26만원짜리 오키나와 왕복 대한항공 티켓을 발견하자마자 결제를 했다. 그 다음에 같은 직업을 가진 친구를 살살 꼬셨다. 그녀는 알까. 이 휴가가 내 생애 최초로 친구와 함께한 휴가였다는 것을. 다니는 동안 발이 되어 준 버스들. 시간표, 노선도 몰라서 한참을 해메었는데. 터미널 가니 정보가 많았다. 잔파 비치 근처의 터미널. 오키나와는 생각보다 큰 섬이었다. '오키나와에 갈거야!'라고 하니까, '어느 섬? 북부?'하고 묻던 일본인 친구의 아리송한 표정은 여행 책을 산 뒤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나는 주차를 할 줄 모르는, 반쯤은 장롱 속에 든 면허의 소유자였고 친구는 여행을 앞두고 운전면허 실기 시험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위험한 운전은 꿈도 꾸지 말라는 신의 계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메마시떼, 도조 요로시꾸 오네가이시마스 국제거리의 비오는 야경 나홀로 일본에 도착한 건 9월 27일 밤이었다. 17호 태풍이 허겁지겁 지나간 터라 대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와서 조금 움츠러든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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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마터면 절필을 할 뻔했다. 절필을 하고 싶었다. 당해낼 수 없을 만큼 좋은 글을 만났기 때문이다. 간사한 마음이다. 거장의 반열에 드는 글쟁이들의 글을 읽을 때는 들지 않는. 닿을 듯 닿지 못할 것 같은 필력을 글을 읽어야 드는 그런 마음.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나 혹은 글쓰기를 좀 즐긴다는 사람들의 빼어난 문장을 보면 언제부터인가 탁 하고 끈을 놓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욕심은 나는데 자신은 없어서다. 한때는 닮고픈 글들을 보면 힘이 나곤 했었다. 어떤 이유로 이렇게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튀기는지 알 듯 하면서도 도무지 모르겠다. 이런 괴상한 직접적 심정들을 뒤로하고 훌훌 떠나버린 언니는 '내가 이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더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봐 괴로웠다는 식으로 회고했다. 그런 순간들이 내게도 찾아온다. 부쩍 빈도가 늘어난 지가 벌써 오래다. 그런데도 미동을 않고 있다. 나약함의 또다른 표출 방식이다. 발만 동동 구르게 된다. 동동 구르던 발 밑의 지반이 자꾸 약해지면 어느날 갑자기 흔적없이 끝없는 심연 속으로 허물어져내릴 것 같다. 겁이 난다.

두 대륙이 사랑한 도시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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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라타 탑이 보인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누빌 수 있는 유람선. '부디 내 인생에 두번째 터키가 있었으면 좋겠다.' 2014년 11월 겨울 휴가를 마치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터키의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한동안 빠져나오기가 힘이 들었다. 수천년의 고도 이스탄불의 왁자지껄한 화려함도 좋았고 어디로 눈을 돌려도 절경 뿐인 카파도키아의 우아한 척박함도 압도적이었다. 새하얗게 반짝이는 파묵칼레에서는 정말 더할 나위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번째 터키는 예상보다 일찍, 뜻밖의 기회로 찾아왔다. 별로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IS 테러니 군부 쿠데타 미수니 해서 온통 국제면을 장식한 뒤였으니까.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고 했다. 그 어느때보다도 헐값에  터키 구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말들도 나오는 때였다. 나의 임무는 만연한 불안을 달랜 뒤 돌아선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터키로 붙잡아매는 일이었다. 갑자기 떨어진 출장에 전후 사정으로 미뤄보아 여러모로 안 가는게 이득이었지만, 오로지 터키라서, 터키이기 때문에 그래도 갔다. 탁심광장. 붉은 깃발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 일이다. 적어야지 적어야지 하던 게 많이 늦어졌다. 내가 다녀간 뒤로 터키는 다사다난한 일을 숱하게 겪었다. IS, 테러, 쿠데타, 새로운 독재. 국제 뉴스로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한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던 이 나라가 생생하게 떠올라 눈이 시렸는데. 내가 다녀오고, 여행 기사를 출고하고, 조금 그 며칠을 잊었을 동안 터키는 꽤나 평온했었다. 그런데 지난주에 다시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인근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면서 국제면 뉴스 거리가 됐다. 더 늦으면 영영 적지 못할 것 같아 뒤늦게 사진을 추려서 아무거라도 적어놓기로 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탁심 광장을 지나가는 엄마와 아이들. 변화 아닌 변화는 눈에 띄게 늘어난 국기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워낙에 이 나라가 국기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