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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3

새벽에 들은 노래 3 한강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 밤마다 뜬눈으로 피흘리는 마음 바닥에는 어떤 아픔이 있는 걸까.  덤덤한듯 절제된듯 지르는 비명같은 목소리.

한강, 회복기의 노래

회복기의 노래 한강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 아주 오랜 시간을 물으며 누워있었구나 생각했다가 이것이 회복기의 노래라면, 하루 해가 가기 전에 회복했다는 얘기 같아서 그 빠른 회복탄력성에 질투를 느꼈다.

한강, 서시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리라는 확신. 이 시집의 평론에는 막스 파카르트의 말이 적혀 있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심연을 잠재우고, 심연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소년이 온다, 한강

소년이 온다 한강/창비 혼은 자기 몸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그게 무슨 날개같이 파닥이기도 할까. 촛불의 가장자릴 흔들리게 할까.  p.45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p.85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95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p.114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

채식주의자, 한강

채식주의자 한강/창비 ".....꿈을 꿨어."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p.14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p.43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책임의 관성으로, 차마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p.64 -채식주의자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어졌다. 그는 더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 앞으로 오랫동안 자신이 작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는 그때 했다. 단 한순간에 그는 지쳤고, 삶이 넌더리났고, 삶을 닮은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 p.83-84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앞뒤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자장가 삼아, 그는 끝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듯 잠들었다.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p.143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