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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된다는 것

엄마가 된다는 것 아이들이 있었다. 열두살 난 소년부터 서너살배기 꼬마까지 네 명. 아버지가 다른 남매들이다. 그들의 존재는 비밀 그 자체다. 공식적으로 태어난 적이 없어서다. 사랑이 끝나고 짐짝처럼 아이가 남겨지는 일이 반복됐다. 혼인신고도, 출생신고도 없이 남자들이 떠난 뒤 남은 엄마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거짓말 뿐이었다. 그녀는 비밀리에 꽁꽁 감춰 아이들을 길러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가족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엄마가 편지와 약간의 돈만 남긴채 아이들을 떠나면서부터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돌아오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두려웠고 외로웠고 배고팠고 힘겨웠지만 저마다의 동심을 발휘하며 끝까지 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세상을 견디기에는 그 노력이 너무 연약했던걸까. 결국 막내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4년작 영화 '아무도 모른다' 얘기다. 먹먹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엔딩크레딧이 끝나고 정지된 화면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복잡한 심경을 굳이 한갈래로 정리하면 '충격'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화'가 있었고 그게 영화보다 더했다는 사실이 충격을 배가시켰다. 1988년 도쿄에서 발생한 ‘스가모 어린이 방치 사건’. 엄마가 비밀리에 기르던 아이들 중 차남이 병사했는데 출생신고되지 않은 아이에 대한 매장 허가가 나올 리 없었다. 그녀는 죽은 아이를 비닐에 싸서 악취제거제와 함께 벽장 속에 넣었다. 그걸 보고 자란 장남이 훗날 죽은 동생을 비슷하게 암매장했다가 적발된다. 이 가족은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여러 감정이 뒤엉킨 충격은 불안으로 구체화됐다. 모성이 본능은 아닐지도 모른다는데서 시작된 불안이었다. 낯설지는 않았다. 수년전 린 램지의 영화 '케빈에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2011)'를 봤을 때도 한차례 겪었으니까. 우리는 알게모르게 모성애가 여성에게 내재된 본능적인

러브레터(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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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터 Love Letter, 1995 드라마, 멜로/로맨스 일본 117분 2013.11.28 재개봉, 2013.02.14 재개봉, 1999.11.20 개봉 이와이 슌지 나카야마 미호(후지이 이츠키/와타나베 히로코) 그는 나의 연인이었습니다. 당신의 추억을 저에게도 나누어 주세요.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래쉬!   너 바보니? "내 사랑은 남풍을 타고 달려요 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내요. 도서카드에 쓴 이름이 정말 그의 이름일까요?  이 추억은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쑥쓰러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 = 겨울만 되면 첫눈처럼 떠오르는 영화. 오랜만에 봤다. 입원한 마지막 날 밤 침대에서 숨죽이고서. 히로코의 사랑 얘기 같지만 결국엔 히로코를 매개로 이츠키가 첫사랑 그녀 이츠키에게 보내는 연서 같은 영화다. 두 여자는 편지를 통해 이츠키를 추억하면서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성장을 겪는다. 이츠키는 미처 알지 못했던 첫사랑을 되찾고 히로코는 못내 보내지 못했던 숨진 약혼자를 비로소 놓아버릴 수 있게 된다. 독서카드 뒷면을 받아든 이츠키의 표정과 바람, 아마도 남풍에 흔들리는 독서카드 속 앳된 이츠키의 초상은 영영 잊지 못할 장면이다. 죽은 소년으로부터 뒤늦게 도착한 러브레터는 수십년을 거슬러 소녀를 그 시절로 데려다놓았다. 아마 오래도록 때아닌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을 테다. 설원 속에서 빨간 스웨터를 입은 히로코가 무너지듯 오열하며 안부를 묻던 장면 역시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홀로 남겨진 여자는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냐고 한참을 속에서 곪았을 감정을 흰 눈밭에 안부로 수놓았다. 그제서야 새 사랑을 찾아 돌아서는 발걸음의 무게를 감히 가늠하기 힘들다. 두 사람의 감정이 모두 나의 것처럼 가깝게 느껴져서 가슴이 아팠다. 첫사랑에 관한 낭만

행복한 사전(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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舟を編む(2013) 감독: 이시이 유야 출연: 마츠다 류헤이, 미야자키 아오이, 오다기리 죠 "서쪽을 향해 섰을때 북쪽이 오른쪽입니다." "말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건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이어지고 싶다는 소망은 아닐까요?" "사랑: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자나깨나 그 사람 생각이 떠나지 않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며 몸부림치고 싶어지는 마음의 상태. 이루어지면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 된다." "'감사' 라는 단어 이상의 단어는 없는지 저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 용례 채집을 해 볼 생각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4학년 때였나. 책에 푹 빠져 지내던 나는 갓 생긴 학교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집에 가지 않았다. 글의 세계는, 그리고 말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었고 언제나 새로운 말들이 불시에 튀어나왔다. 사전을 끼고 책을 읽었다. 그러다 나는 사전을 읽기 시작했었다. 'ㄷ'의 중간까지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다 사전을 읽을 생각을 했는지 어떤식으로든 좋은 영향을 받았으리란 생각에 지금 돌이켜봐도 스스로 기특한 기분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자라나며 기계 문명의 혜택을 지나치게 받게 됐고 종이사전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갔다. 공부를 하겠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은 중학교 때부터 전자사전이 필수품이 됐고 대학에 진학해서는 휴대폰의 사전 기능에 자꾸만 손이 갔다. 영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조금은 부끄러웠다. 한때 사전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사전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해선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행복한 사전'은 사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대답을 길고 느린 호흡으로 풀어낸다. 경이에 가까운 그 작업은 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