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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기원, 정유정

종의기원 정유정/은행나무 나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고 이마를 찡그리는 것을, 코와 뺨이 동시에 빨개지는것을, 칼날이라도 삼키는 양 어렵사리 침을 넘기는 것을. 3차방정식 같은 표정이었다. 복잡하고도 낯선 얼굴이었다. 해진처럼 슬픈 것인지, 해진의 슬픔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인지, 해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인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 걱정 말라는 것인지. 전부 다인지, 모두 아닌지.  p.104-105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p.139 "40년 결혼 생활 끝에 아내를 도끼로 찍어 죽이고 토막 낸 명망 있는 의사, 두 번이나 은행을 털고도 법의 선처를 받은 운 좋은 도둑놈, 남동생을 욕조에 눕혀 죽이고 자기도 목을 맨 아름다운 첼리스트......." 이런 사람들을 변호했다는 한 변호사가 쓴 책이었다. 그의 말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도덕이란, 말이 되는 그림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p.144 한동안 망설인 끝에 녀석은 장황한 문학적 수사를 늘어놓았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말이었다.  내가 아흔여덟살 쯤 먹어 죽음을 눈앞에 뒀을 때, 신이 나를 데리러 와서 네 인생 어디쯤에 한번 들렀다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세상이 스르르 사라지던 어젯밤 그 순간으로 가고 싶다고 대답하겠다.  세상이 스르르 사라지는 게 어떤 느낌일까.  p.187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 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