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인 게시물 표시

프롤로그: 아름다운 이별, 모험의 시작

이미지
거친 바다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어가는 물개. 퇴사한 나를 닮았다고나 할까.  20170628, San Christobal Island , Galapagos, Ecuador 사랑했다. 그것도 꽤 열렬히. 이유라면 이유라 할 것들이 있었지만, 돌이켜보니 그냥 좋았던 것 같다. 막연한 환상이나 무지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20대 초반이면 중요한 결정을 하기엔 퍽 어린 시기이니까. 당시의 열정은 맹목적이었다. 한 눈 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차례 거절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도전했다. 부족한 내 탓도, 피치 못할 상황 탓도 해 봤다. 끝끝내 받아들여진 건 한 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자리에서 분명 날아갈 것처럼 기쁜 날들이 있었다. 매일이 새롭고 설렜다. 죽을 만큼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버텼다. 그럴 수 있었다. 푹 빠져서 허우적댈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한 해 두 해 세월이 쌓일수록 차츰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또 시들해졌다. 기쁜 날들만큼 괴로운 날들이 생겨났고,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 역전이 일어났다. 마음속에서는 잡다한 의문들이 꿈틀거렸다.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좋은 사람일까. 나는 여기 적합한 사람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삶이 최선일까. 뜨거움이 시나브로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초심이 제 빛을 잃은 건 아마도 그 공허하고 울적한 물음표들 사이 어디쯤부터였을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기 전에 올려다 봤던 하늘. 꽃나무가 참 예뻤다. 한국을 떠날 때의 푸르른 가로수 만큼이나. 20170823, Victoria Falls, Zimbabwe 오랫동안 전부라고 믿었던 것들과 서먹해지자 삶은 정물 같기만 했다. 어쩌면 그게 대다수의 성숙한 어른들이 짊어지고 살아가는 생활이자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봤다. 그래도 아프고 슬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내가 커다란 갈림길 앞에서 대개 안주를

이병률,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이병률 종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한때는 돌을 잘 다루는 이 되고도 싶었는데 이젠 다 집어치우고 아주 넓은 등 하나를 가져 달(月)도 착란도 내려놓고 기대봤으면 아주 넓고 얼얼한 등이 있어 가끔은 사원처럼 뒤돌아봐도 되겠다 싶은데 오래 울 양으로 강물 다 흘려보내고 손도 바람에 씻어 말리고 내 넓은 등짝에 얼굴을 묻고 한 삼백년 등이 다 닳도록 얼굴을 묻고 종이를 잊고 나무도 돌도 잊고 아주 넓은 등에 기대 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으면 = 착란(錯亂). 그건 1025일간의 착란이었다. 내가 너무 어리고, 미숙하고, 손쉽고, 순진해서, 그래서 열병처럼 겪은 착란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왔다. 모든 지난 날의 실체와, 낯설기만 한 그의 정체와, 그 사이에서 애써 위안하며 외면해온 나의 질병이 까발려졌다. 갑작스러웠으나, 차라리 선물이었다. 청춘의 낭비는 이로써 충분했다.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무의미하게 앓지도, 잃지도, 울지도 않을 것이다.

환절기

여름에서 가을로, 네게서 내게로. 1. 여름이 꺾이는 광경을 봤다. 나는 막이 내리는 여름의 잔해를 눈으로 좇으며 잰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변하는 것에 대한 예의를 갖출 여유가 행인에게는 없다. 때맞춰 계절을 주입하는 사거리 빌딩에는 먼 이국 시인의 글귀가 걸렸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메리 올리버, 휘파람 부는 사람. 2. 하루 전에는 내 안에서 우주 하나가 산산히 부서졌다. 비로소 이별이었다. 걸음마다 헤어짐을 되새기며 주말 늦은 밤 지하철역을 무거운 걸음으로 내달렸다. 그동안 약간의 상처와 약간의 후회와 약간의 분노와 약간의 미련이 멋대로 뒤엉켰다. 설익은 감정들은 제각기 자리를 찾기 위해 내 좁은 맘 속을 헤맸다. 3. 가장 먼저 상실을 지우려 든 건 당사자들과 무관한, 조금은 사소한 존재였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앞선 여자에게 붙어있던 무당벌레. 조그맣고 새빨간 게 주황색 후드 티셔츠 모자 아래서 나타났다. 꽤나 분주하게 여자의 등부터 목과 머리 사이사이를 오갔지만 그녀는 기척이 없었다. 무당벌레가 꼭 내 모습 같았다. 눈물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