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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코다의 노래

코다의 노래 이제니 손을 씻자 낯빛이 검어졌다. 내 어둠의 깊이를 헤어리는 밤. 오래된 망상과 코카콜라와 데스메탈과 카발라와 차오르는 귓구멍의 물기와 너와 나의 아득한 피킹 하모닉스. 나의 기타는 너무 많은 심장을 가진 것처럼 끊어지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으로. 새끼손가락이 짧은 나의 운지법은 더듬더듬 춤추듯 절룩거리고. 적막이란 적막 이전에 소리가 있었다는 말. 너무 많은 심장이 우리를 질식하게 한다. 생각한 그대로 끝에서 끝까지 밀고 나아가려 했던 것이 우리의 때아닌 조로의 이유. 너는 사각형의 소녀처럼 울었고 그 뾰족한 모서리가 무심히 나를 찔렀다. 뜬눈으로 꿈속을 들락거리다 다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시적인 문장을 찾으려 할 때마다 죄를 짓는 기분. 조금도 시적이지 않은 언어의 빙판 위에서 나 자신과 분리된 불안은 시적으로 미끄러지고. 당분간은 자살하지 않을 거라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다짐을 하고. 이곳은 너무 어둡고 너의 개념은 모질고 한번도 내가 원한 자리에 놓여 있었던 적이 없고. 데크레센도 데크레센도 코다의 노래. 내가 바라는 건 아주 작고 희미한 것들뿐. 단 한 순간도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것. 매순간 초연해지길 바라지만 혁명을 하기엔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풍경을 읊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너는 또다시 성냥을 긋듯 손목을 긋고. 마음으로 악담을 퍼붓고 돌아서전 시절. 속쓰림과 배고픔과 후회와 반서이 아코디언 주름처럼 펼쳐졌다 접히기를 반복하고. 내겐 더이상 날개가 없다.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321 창비 =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클라이막스여서 가장 완성도 높은 에필로그가 된다.  계속 더 나은 문장을 향해 나아가려는 갈증 같은 것이 담겼다.

이제니,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이제니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늘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너의 수첩은 얇아질 대로 얇아진 채로 스프링만 튀어오를 태세. 나는 그래요. 쓰지 않고는 반성할 수 없어요.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너의 습관.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지친다. 지칠 만도 하다.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그러나 너는 등을 보인 채 창문 위에 뜻 모를 글자만 쓴다. 당연히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입김이라도 새어나오는 겨울이라면 의도한 대로 너는 네 존재의 고독을 타인에게 들킬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 언제부터 겨울이란 말이냐. 겨울이 오긴 오는 것이냐. 분통을 터뜨리는 척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중얼거린다. 너는 등을 보인 채 여전히 어깨를 들썩인다. 창문 위의 글자는 씌어지는 동시에 지워진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나도 그래요. 우리의 안녕은 이토록 다르거든요. 너는 들썩인다 들썩인다. 어깨를 들썩인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 321 창비 = 그저 봄이 오긴 오는 것이라고 믿으며.

이제니, 별 시대의 아움

별 시대의 아움 이제니 어제 익힌 불안의 자세를 복습하며 한 시절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 막 떠올랐다 사라져버린 완벽한 문장.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언어의 심연. 시대에 대한 그 모든 정의는 버린 지 오래. 내 시대는 내가 이름 붙이겠다.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여전히 귓가엔 둥둥 북소리. 내 심장이 멀리서 뛰는 것만 같다. 세계는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것. 의심을 하려거든 너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너의 귀를 씻어라. 언제나 우린 멀리 더 멀리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 극동의 자퐁으로 가자, 극동의 자퐁으로. 그러나 그대여, 누군가에겐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이 극동이다. 일곱 계단의 정신세계. 식어버린 수요일의 요리를 먹고 얼굴을 가릴 망토도 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날들. 차라리 녹아내리기를 바라던 유약한 심정으로. 시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내가 가진 단어를 검열하는 오래된 버릇. 무한반복되는 기하학적 무늬의 영혼을 걸치고 혼자만의 아주 작은 구멍으로 빨려들어갈듯한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어제의 기억에 단호히 마침표를 찍는 사람의 마지막 타들어가는 담배가 되고 싶다. 타닥 타닥 타닥. 질 좋은 담배는 이런 식의 싸구려 발성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싸구려 발상법에 익숙하다. 구토라도 하듯 목구멍에서 말들이 쏟아져내린다.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나비가 날고 있다. 너무 많은 바퀴 단 것들이 우루루 지나간다. 문득 비둘기 한 마리가 욕설을 퍼부으며 내 발치에 내려앉는다. 구구구 구구구. 구구단을 외우고 좀 울어도 좋을 날씨. 한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오래전 잃어버린 문장 하나가 입속에서 맴돈다. 이 거리에서 몇번 굴러야 할지 몰라 두 번만 굴렀다. 앞으로 두 번, 뒤로 두 번, 후회 반성 고쳐 말하기는 오래된 나의 지병. 얼룩이 남는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다. 한 시절을 훑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먼지 같은 사람과 먼지 같은

오은, 시간차공격

시간차공격 오은 기다리는 사람 찾아오는 것 시간에 금이 가던 순간 순간에 윤이 나던 시간 시간은 길지 않고 순간은 많지 않아서 금은 틈을 내고 윤은 무늬를 이루었다 시간은 촘촘하지 않고 순간은 아질아질해서 그 틈에 발이 빠진 적도 있었다 그 무늬에 넋을 빼앗겨 한데 어룽진 적도 있었다 기다리는 것 찾아오는 사람 문이 열렸다 공기가 들어왔다 몇 개의 단어가 사연을 품고 따라 들어왔다 하나의 몸뚱이에서 겹침이 일어났다 시간이 오직 순간이던 때가 있었다 순간이 시간을 꽉 채우던 때가 있었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벌써 찾아오고 난 뒤에 아직 기다리는 움직임이 있었다 충만한 상실감이 있었다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 시인선 488 문학과지성사 = 그 공격 앞에 속수무책 

오은, 청춘

청춘 오은 거센소리로 머물다가 된소리로 떠나는 일 칼이 꽃이 되는 일 피가 뼈가 되는 일 어떤 날에는 내 손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 손은 내가 아니니까 내 마음이 아니니까 자유는 늘 부자연스러웠다 몸의 부기를 빼는 일 마음을 더는 일 다시 예사소리로 돌아가는 일 꿈에서 나와 길 위에 섰다 아직, 꿈길 같았다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 시인선 488 문학과지성사 = 모난 것들이 아름다워지고, 흐르는 것들은 단단해지는 시간이 되기를

김민정,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김민정 지지난 겨울 경북 울진에서 돌을 주웠다 닭장 속에서 달걀을 꺼내듯 너는 조심스럽게 돌을 집어들었다 속살을 발리고 난 대게 다리 두 개가 V자 안테나처럼 돌의 양옆 모래 속에 꽂혀 있었다 눈사람의 몸통 같은 돌이었다 야호 하고 만세를 부르는 돌이었다 물을 채운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담그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냈는가 하면 물을 버린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놔두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내기도 했다 먹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밤이었다가 낮이었다가 사과 쪼개듯 시간을 반토막 낼 줄 아는 유일한 칼날이 실은 돌이었다 필요할 땐 주먹처럼 쥐라던 돌이었다 네게 던져진 적은 없으나 네게 물려본 적은 있는 돌이었다 제모로 면도가 불필요해진 턱주가리처럼 밋밋한 남성성을 오래 쓰다듬게 해서 물이 나오게도 하는 돌이었다 한창때의 울이들이라면 없을 수 없는 물이잖아, 안 그래 물은 죽은 사람이 하고 있는 얼굴을 몰라서 해도 해도 영 개운해질 수가 없는 게 세수라며 돌 위에 세숫비누를 올려둔 건 너였다 김을 담을 플라스틱 밀폐용기 뚜껑 위에 김이 나갈까 돌을 얹어둔 건 나였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 = 단지 제목에 이끌려 산 시집이었다. 이렇게 쉽게 시를 쓰나 싶기도 했고,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장난치듯 늘어놓은 일상의 조각들 틈바구니에서 간혹 싸르르한 시구들이 마음에 와닿았다. 

이장욱, 얼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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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처럼 이장욱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나는 자꾸 물과 멀어졌으며 매우 견고한 침묵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끝까지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저 너머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들을. 그것은 꽉 쥔 주먹이라든가 텅 빈 손바닥 같은 것일까? 길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지상을 겨누거나 폭설처럼 모든 걸 덮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위바위보는 아니다. 맹세도 아니다.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 아침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사> = 이장욱 시인의 시집.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곱씹으며 읽을 수 밖에 없는 시들이 즐비했다. 한 편 한 편, 문장마다 들어선 시어들은 단정하고도 깊숙하게 마음을 울렸다. '얼음처럼'이라는 이 시에 시집의 제목이 등장한다. 겨울에 읽으니 계절감이 더했다. 알 수 없이 모호한 것들, 모든 것이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각자의 내면에서 차츰 투명해지고 또 단단해진다.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려한 시들 가운데서 유독 표지에 적힌 시인의 말이 와닿았다. 아래와 같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고 중얼거렸다. 그것이 차라리 영원의 말이었다. 물끄러미 자정의 문장을 썼다. 나는 의욕을 가질 것이다." 참고로 읽음직한 한겨레 토요판 시 코너의 이장욱 시인 글. '책보다 소중한 것들'

김사인, 화양연화

화양연화(花樣年華)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못내 영원하지 못하고 져버린 것들에 대한 꾸밈없는 작별인사.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살아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 김광규 옮김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1944) =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영화 암살을 보고 나서다. 죽음이 도처에 즐비한 시대를 견디고 혼자 살아남는다는것, 그 먹먹한 고독의 깊이는 함부로 측량할 수 없는 것일 터. 시인은 쉽고도 명료한 단어로 그런 슬픔의 깊이를 가만히 토해내고 있다.

나태주, 사랑에 답함

사랑에 답함 나태주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사람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 명료하다.

김근, 너의멸종

김근 너의멸종 너는 멸종했다 너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너 아닌 것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나는 실패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고 어리석은 별들이 순식간에 졌다 우리의 어제는 우리와 함께 사라졌다 내일은 도착할 기약이 없고 오늘만 영원하다 땡볕 속에 응애응애 어느 병원에선가 또다시 너라는 병원체를 보유한 너의 새끼들이 태어난다 새끼들은 점점 너로 자라나 너의 흉내를 내며 너의 얼굴을 달고 지겹도록 살고 살아가고 그들의 입에서 흘려보낸 너의 메아리들이 도시 곳곳에서 불어 다닌다 수많은 벽들에 부딪쳐 본래 목소리조차 알 수 없게 된 메아리들로 거리는 온통 웅웅거리고 그렇게 혼곤하게 거리는 거리가 아닌 채로 있다 있기만 한다 나는 내가 아닌 채로 이제 그만 내 껍질을 찢어 버린다 한때 나였던 껍질이 내 문 앞에 쌓여 간다 껍질과 함께 흘러내리는 울음들은 시나 브로 화석으로 굳어가고 우리의 시간은 발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느 때고, 끝없이 나는 실패하고, 사라지지는 결코 않는 오늘, 너라는 것들의 멸종은 멈출 줄을 모른다, 끝도 없이. = 할듯 말듯 멸종하지 않는 존재. 그 심연에서 나침반도 지도도 없이 유랑하는 나.

이장욱, 좀비 산책

좀비 산책 이장욱 비가 내리자 나는 드디어 단순해졌다 당신을 잊고 잠깐 무표정하다가 아침을 먹고 잤다 낮에는 무한한 길을 걸어갔다 친구들은 호전적이거나 비관적이고 내 몸은 굳어갔다 한 사람을 살해하고 두 사람을 사랑하고 잠깐 울다가 음악을 들었다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나의 죽음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금욕적이며 장래 희망이 있다 1968년이 오자 프라하의 봄이 끝났다 레드 제플린이 결성되었다 김수영이 죽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여전히 태어나지 않았다 비가 내리자 나는 단순하게 잠깐 울다가 전진하였다 =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래 희망이라는 틀에 박힌 단어로 위안삼으면서. 울음조차 잠깐인 채로 그러나 무얼 위해 전진하는 지 모르는 상태로 그저 떠도는 것은 아닐까. 나의 사랑은, 나의 죽음은 변하지 않았나.

박준, 마음 한 철

마음 한 철 박준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눈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 ( 影 幀 )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어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 그럴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곳에 남아있을 그 이름들, 남몰래 새긴 흔적들. 무심한듯 그렇게 추억이 제법 쌓여버렸다.

최영미, 옛날의 불꽃

옛날의 불꽃 최영미 잠시 훔쳐온 불꽃이었지만 그 온기를 쬐고 있는 동안만은 세상 시름, 두려움도 잊고 따뜻했었다 고맙다 내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해 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 계절이 깊었다. 온갖 따듯한 것들에 대한 향수가 짙어진다. 추워서 그런거겠지. 나는 담백해지려면 멀었다.

백창우, 오렴

오렴 사는 일에 지쳐 자꾸 세상이 싫어질 때 모든 일 다 제쳐두고 내게 오렴 눈물이 많아지고 가슴이 추워질 때 그저 빈 몸으로 아무 때나 내게 오렴 네가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방 하나 마련해 놓고 널 위해 만든 노래들을 들려줄게 네가 일어날 때 아침이 시작되고 네가 누울 때 밤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너를 찾으렴 망가져 가는 너의 꿈을 다시 빛나게 하렴 = 저렇게 쉴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누군가에게 저런 쉼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의 망가진 꿈을 빛나게 할 수 있는 건 얼마나 장엄하고 숭고한 일인지. 신 말고도 저런 안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큰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이 되고 싶다. 사실 이 시와 대구를 이루는 '가렴'이라는 같은 시인의 시가 있는데 그 시는 어쩐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적고 싶지가 않다. 늘 모두가, 오기만 했으면 좋겠다. 떠나지 않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다가올 미래의 세대를 옹호하고 인정하며, 지난 세대를 구제하는 자를. 그러한 자는 오늘의 세대와 씨름하면서 파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상처를 입어도 그 영혼의 깊이를 잃지 않으며 작은 체험만으로도 멸망할 수 있는 자를. 그런 자는 이렇게 하여 즐거이 다리를 건너간다.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은 채 만물을 자신 안에 간직할 만큼 그 영혼이 넘쳐흐르는 자를. 그리하여 만물이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 -p.19~21 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p.63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언제나 약간의 망상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 망상 속에도 언제나 약간의 이성이 들어 있다. 삶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내게도 나비와 비눗방울, 그리고 인간들 가운데서 나비와 비눗방울 같은 자들이 행복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p.65 그대는 새로운 힘이며 새로운 권리인가? 최초의 움직임인가?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가는 수레바퀴인가? 그대는 또한 별들을 강요하여 그대 주위로 돌게 할 수 있는가? -p.108 고독한 자여, 그대는 창조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대는 그대의 일곱 악마로부터 하나의 신을 창조하려고 한다! 고독한 자여, 그대는 사랑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대는 자신을 사랑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경멸한다. 사랑하는 자만이 경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것을 경멸할 줄 몰랐던 자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그대의 사랑과 함께, 그리고 그대의 창조와 함께, 형제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나중에서야 정의가 절름거리며 그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