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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미셸 우엘벡

플랫폼 미셸우엘벡/김윤진 옮김/문학동네 "지금은 의심스러워.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 점점 더 자주 의심이 생겨." 며칠 후 똑같은 대화가 되풀이되었다.  p.264 나는 태국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내 주변에는 답답하고도 서글픈 장벽이 형성되었다. 내가 결코 아시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렇지만 그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세상을 산다. 그저 세상으로부터 먹을 것과 애무와 사랑만 얻으면 되는 것이다.  ... 사랑에 대해서는 말하기 힘들다. 나는 이제 확신한다. 내게 발레리는 찬란한 예외였을 뿐이라고. 그녀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고, 그것을 매우 신중하게 자신의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에 속했다. 그 일은 참으로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그 속에는 행복과 솔직함과 기쁨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만일 내가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 나머지를 이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p.466 이제 나는 죽음을 이해했다. 죽음이 내게 크게 고통스러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증오, 경멸, 노화 그 밖에 여러가지 것들을 겪었다. 심지어 짧은 사랑의 순간도 있었다. 내게서 살아남을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그 무엇이 살아남는 것 또한 내게 마땅치 않다. 나는 어느 모로 보나 보잘것없는 개별적인 존재일 것이다. p.467-468 = '논쟁적인 작가' 라더니만. 실로 논쟁적인 소설이었다. 한없이 염세적이기도 했다. 오리엔탈리즘에 성적으로만 매료된 것으로 보이는 남자주인공의 시선이 꽤 불편했다. 갑작스럽게 여행산업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좀 따분하기도 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주인공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대목은 당황스러웠다. 이 소설 대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 미셸 투르니에 (Michel Tournier) 민음사(2012) 주의력의 한계는 점점 깊어지는 동시에 좁아졌다. 이젠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골몰한 한 가지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옮겨 가는 일마저 점점 더 어려워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타인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강력한 주의력 전환 요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45 오직 과거만이 중요한 존재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현재는 추억의 샘, 과거의 생산 공장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산다는 것은 오직 그 값진 과거의 자산을 늘리기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죽음이 오는 것이었다. 죽음은 그 축적된 금광을 향유할 수 있는 순간에만 진정한 죽음이었다. 우리가 소란스러운 현재 속에서 보다 더 깊이 있게, 주의 깊게, 현명하게 감각적으로 삶을 음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다. p.50-51 글을 쓴다는 이 성스러운 행위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갑자기 지금까지 빠져 있었던 동물성의 심연으로부터 반쯤 헤어 나와 정신세계로 진입한 느낌이었다. ... 그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그가 수치스럽게 여기고 잊어버리고자 하는 실수의 시절이 지나간 다음 이 섬에서의 진정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p.56 나의 상황은 미덕에 최대를, 악덕에 최소를 걸며 용기와 힘과 자기 긍정과 사물들에 대한 지배를 미덕이라고 부르기를 요구한다. 악덕은 포기와 체념, 즉 진창이다. 그것은 아마 기독교 저 너머 인간적 지혜의 고대적 비전으로 되돌아가서 오늘의 미덕(Vertu)에 고대의 덕성(Virtus)을 대체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어떤 기독교의 심저에는 자연과 사물에 대한 근원적 거부가 도사리고 있다. 나는 스페란차에 대하여 그 거부를 지나치게 실천에 옮겼던 것인데 그것은 나의 멸망을 초래할 뻔했다. 반대로 나는 오직 이 섬을 받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Aimer-vous Brahms... (민음사)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는 포도주를 한 모금 길게 마셨다. 폴을 반박하지 않았다. p.43-44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짧은 그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 뿐인지도 몰랐다. p.56-57 그에게 인생이라는 걸 가르치는 데는 시간이 자신보다 더 유능하겠지만, 그러려면 훨씬 오래 걸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