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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공터의 사랑

공터의 사랑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 공터에 무지개를 띄우고, 잊었던 꿈을 앓는 일

이장욱,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이장욱 무섭다 결국 그곳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섭다 마음이 무섭고 몸이 무섭고 싹 트고 잎 피고 언제나 저절로 흐드러지다가 바람 불어 지는 내 마음속 꽃잎 꽃잎, 그대가 무섭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하나의 고요한 세상을 지니고 있으니, 무섭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끄는 매혹에 최선을 다해 복종하였으므로 내 고요한 세상에 피고 지는 아름다운 모반을 주시하였다 그대가 처연히 휘날려 내 몸과 마음이 어지러울 때 단 한번도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흘러가는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기억을 만나면 기억을 죽이고 불안을 만나면 불안을 죽이고, 그러므로 이제 이 눈과 코와 입과 귀를 막아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시길 그대에게 익숙한 세상으로 나를 인도하여 그대 몸과 마음에 피고 지는 싹과 잎과 꽃이 되게 하시길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이 고요한 세상을 처연히 흩날리도록, 내 몸과 마음의 꽃잎 꽃잎 피고 지는 그곳에 기다리는 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이장욱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의 시 111 = 이미 흐드러진 마음을 지키기 위해 의심 없이 흔들림 없이 기억과 불안을 죽이며 견디는 것. 나약하나 고귀하다.

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3

새벽에 들은 노래 3 한강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 밤마다 뜬눈으로 피흘리는 마음 바닥에는 어떤 아픔이 있는 걸까.  덤덤한듯 절제된듯 지르는 비명같은 목소리.

이제니, 코다의 노래

코다의 노래 이제니 손을 씻자 낯빛이 검어졌다. 내 어둠의 깊이를 헤어리는 밤. 오래된 망상과 코카콜라와 데스메탈과 카발라와 차오르는 귓구멍의 물기와 너와 나의 아득한 피킹 하모닉스. 나의 기타는 너무 많은 심장을 가진 것처럼 끊어지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으로. 새끼손가락이 짧은 나의 운지법은 더듬더듬 춤추듯 절룩거리고. 적막이란 적막 이전에 소리가 있었다는 말. 너무 많은 심장이 우리를 질식하게 한다. 생각한 그대로 끝에서 끝까지 밀고 나아가려 했던 것이 우리의 때아닌 조로의 이유. 너는 사각형의 소녀처럼 울었고 그 뾰족한 모서리가 무심히 나를 찔렀다. 뜬눈으로 꿈속을 들락거리다 다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시적인 문장을 찾으려 할 때마다 죄를 짓는 기분. 조금도 시적이지 않은 언어의 빙판 위에서 나 자신과 분리된 불안은 시적으로 미끄러지고. 당분간은 자살하지 않을 거라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다짐을 하고. 이곳은 너무 어둡고 너의 개념은 모질고 한번도 내가 원한 자리에 놓여 있었던 적이 없고. 데크레센도 데크레센도 코다의 노래. 내가 바라는 건 아주 작고 희미한 것들뿐. 단 한 순간도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것. 매순간 초연해지길 바라지만 혁명을 하기엔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풍경을 읊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너는 또다시 성냥을 긋듯 손목을 긋고. 마음으로 악담을 퍼붓고 돌아서전 시절. 속쓰림과 배고픔과 후회와 반서이 아코디언 주름처럼 펼쳐졌다 접히기를 반복하고. 내겐 더이상 날개가 없다.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321 창비 =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클라이막스여서 가장 완성도 높은 에필로그가 된다.  계속 더 나은 문장을 향해 나아가려는 갈증 같은 것이 담겼다.

김선우, 花飛, 먼 후일

花飛, 먼 후일 김선우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그 나무 아래서 꽃잎을 묻어주는 너를 본다 지상의 마지막 날까지 너는 아름다울 것이다 네가 있는 풍경이 내가 살고 싶은 몸이니까 기운을 내라 그대여 만 평도 백 평도 단 한 뼘의 대지도 소속은 같다 삶이여 먼저 쓰는 묘비를 마저 써야지 잘 놀다 갔다 완전한 연소였다 김선우 시집 <녹턴> 문학과지성 시인선 483 = 사랑과 죽음 사이에 흐르는 차원 다른 몽환의 시간, 거기 미리 바친 애도의 노래들. 마지막 순간에 이토록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말을 남기고 날아가는 꽃과 같이 갈 수 있다면.

김선우, 소울메이트

소울메이트 김선우 1 반쪽 빛을 찾아 헤메는 것이 아니라 반쪽 어둠을 찾아 영접하는 것이다. 영혼은 본래부터 완전하였다. 2 영혼의 혈거 그 바닥엔 우주먼지로 지어진 밥상 하나 그 위엔 먼지의 밥 한 그릇 숟가락 두 개 바라보며 나누어 먹으며 가끔 입가를 닦아주며 김선우 시집 <녹턴> 문학과지성 시인선 483 = 첫 행에서 쿵 했다. 완전한 영혼을 부수면서까지 어둠을 귀하게 끌어안는 것.

박준, 세상 끝 등대 3

세상 끝 등대 3 박준 늘어난 옷섶을 만지는 것으로 생각의 끝을 가두어도 좋았다 눈이 바람 위로 내리고 다시 그 눈 위로 옥양목 같은 빛이 기우는 연안의 광경을 보다 보면 인연보다는 우연으로 소란했던 당신과의 하늘을 그려보는 일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 그 모든 우연이 인연의 근거라고 믿었는데 이 시를 읽는 순간 그게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소란한 우연에 들뜬 채 내달린 것일 뿐이었을까 싶어 쓸쓸해졌다. 

허수경, 불취불귀

불취불귀 허수경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 잔뜩 취한 채 봄의 끝자락을 비틀거리는 것 같은 애달픔이었다.  완전히 무너진채로 미친듯이 써내려갔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시인 언니와 한잔 기울이고 싶었다. 특히 이 시를 여러번 읽었다. 동사서독을 영화관에서 보던 날의 기억들이 비틀비틀 마음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박준, 우리들의 천국

우리들의 천국 박준 곁을 떠난 적이 있다 당신은 나와 헤어진 자리에서 곧 사라졌고 나는 너머를 생각했으므로 서로 다른 시간을 헤매고 낯익은 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 시간과 공간 사이, 우리는 서로가 없어도 잔상들을 웃자라게 했으므로 근처 어디쯤에는 그날 흘리고 온 다짐 같은 것도 있었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 우리를 우리라고 할 수 있을지, 천국을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낱말 하나하나가 사무쳐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한강, 회복기의 노래

회복기의 노래 한강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 아주 오랜 시간을 물으며 누워있었구나 생각했다가 이것이 회복기의 노래라면, 하루 해가 가기 전에 회복했다는 얘기 같아서 그 빠른 회복탄력성에 질투를 느꼈다.

이제니, 남겨진 것 이후에

남겨진 것 이후에 이제니 흰 집 건너 흰 집이 있어 살아가는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지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뜨리는 유년의 얼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서 서성이는 눈빛으로 인간 저 너머의 음역으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듯이, 한밤의 고양이와 친해진 것은 어느 결에 사람을 저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사람이라는 말. 그저 사랑이라는 말.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울어라.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네 자신으로 존재하여라. 두드리면 비춰 볼 수 있는 물처럼. 물은 단단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남겨진 것 이후를 비추고 있었다.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520 = 어떤 기억에 대해서, 나 대신 쓴 것만 같은 시. 단단한 얼굴에 비추어진 이후는 어떠한가.

신철규, 눈물의 중력

눈물의 중력 신철규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고 밤은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 밖에 없다 눈을 감으면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닌다 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 그의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 못 박힐 손과 발을 몸안으로 말아넣고 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 밤은, 달이 뿔이 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시인선 096 =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는 슬픔.  손으로 눈물을 받으며 엎드려 우는 누군가의 모습을, 생전엔 만난 적 없던 어린 영혼들의 빈소에서 밤마다 매일 보아야 했던 때가 있었다.  신은 어쩌면 그 등마다 걸터앉아 있거나 땅으로 스미는 눈물을 함께 받치고 있었을텐데, 그들은 도대체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단단히 울었을 것이었다.  자려고 누워도 귀에서 울음소리가 떠나지 않던 날들이었다.

한강, 서시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리라는 확신. 이 시집의 평론에는 막스 파카르트의 말이 적혀 있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심연을 잠재우고, 심연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박준, 세상 끝 등대 1

세상 끝 등대 1 박준 내가 연안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 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더니 너머가 되어버린 것

박준, 저녁 - 금강

저녁 - 금강 박준 소멸하는 약력은 나도 부러웠다 풀 죽은 슬픔이 여는 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따라올라가면 은어가 하루처럼 많던 날들이 나온다 저녁 강의 시야(視野)가 그랬다 출발은 하겠는데 계속 돌아왔다 기다리지 않아도 강변에서는 공중에서 죽은 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땅으로 떨어지지도 않은 새의 영혼들이 해를 등지고 다음 생의 이름을 점쳐보는 저녁 당신의 슬픈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빛이 주저앉은 길 위에는 물도 하릴없이 괴어들고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 온통 새하얗고 드넓은 눈밭 위로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극지의 밤, 이불 속에 웅크려 이 시를 읽으면서 눈빛이 주저앉은 길이 어떤 건지, 조금 알 것 같아서 마음이 먹먹했었다.

이제니,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이제니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늘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너의 수첩은 얇아질 대로 얇아진 채로 스프링만 튀어오를 태세. 나는 그래요. 쓰지 않고는 반성할 수 없어요.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너의 습관.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지친다. 지칠 만도 하다.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그러나 너는 등을 보인 채 창문 위에 뜻 모를 글자만 쓴다. 당연히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입김이라도 새어나오는 겨울이라면 의도한 대로 너는 네 존재의 고독을 타인에게 들킬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 언제부터 겨울이란 말이냐. 겨울이 오긴 오는 것이냐. 분통을 터뜨리는 척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중얼거린다. 너는 등을 보인 채 여전히 어깨를 들썩인다. 창문 위의 글자는 씌어지는 동시에 지워진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나도 그래요. 우리의 안녕은 이토록 다르거든요. 너는 들썩인다 들썩인다. 어깨를 들썩인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 321 창비 = 그저 봄이 오긴 오는 것이라고 믿으며.

심보선, 청춘

청춘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문학과지성사 = 나 여전히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그 시간을 살아내고 있구나 싶어서, 눈물도 웃음도 났다.

심보선, 식후에 이별하다

식후에 이별하다 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문학과지성사 = 기어이 환하고야 마는가

이제니, 별 시대의 아움

별 시대의 아움 이제니 어제 익힌 불안의 자세를 복습하며 한 시절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 막 떠올랐다 사라져버린 완벽한 문장.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언어의 심연. 시대에 대한 그 모든 정의는 버린 지 오래. 내 시대는 내가 이름 붙이겠다.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여전히 귓가엔 둥둥 북소리. 내 심장이 멀리서 뛰는 것만 같다. 세계는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것. 의심을 하려거든 너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너의 귀를 씻어라. 언제나 우린 멀리 더 멀리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 극동의 자퐁으로 가자, 극동의 자퐁으로. 그러나 그대여, 누군가에겐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이 극동이다. 일곱 계단의 정신세계. 식어버린 수요일의 요리를 먹고 얼굴을 가릴 망토도 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날들. 차라리 녹아내리기를 바라던 유약한 심정으로. 시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내가 가진 단어를 검열하는 오래된 버릇. 무한반복되는 기하학적 무늬의 영혼을 걸치고 혼자만의 아주 작은 구멍으로 빨려들어갈듯한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어제의 기억에 단호히 마침표를 찍는 사람의 마지막 타들어가는 담배가 되고 싶다. 타닥 타닥 타닥. 질 좋은 담배는 이런 식의 싸구려 발성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싸구려 발상법에 익숙하다. 구토라도 하듯 목구멍에서 말들이 쏟아져내린다.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나비가 날고 있다. 너무 많은 바퀴 단 것들이 우루루 지나간다. 문득 비둘기 한 마리가 욕설을 퍼부으며 내 발치에 내려앉는다. 구구구 구구구. 구구단을 외우고 좀 울어도 좋을 날씨. 한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오래전 잃어버린 문장 하나가 입속에서 맴돈다. 이 거리에서 몇번 굴러야 할지 몰라 두 번만 굴렀다. 앞으로 두 번, 뒤로 두 번, 후회 반성 고쳐 말하기는 오래된 나의 지병. 얼룩이 남는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다. 한 시절을 훑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먼지 같은 사람과 먼지 같은

오은, 시간차공격

시간차공격 오은 기다리는 사람 찾아오는 것 시간에 금이 가던 순간 순간에 윤이 나던 시간 시간은 길지 않고 순간은 많지 않아서 금은 틈을 내고 윤은 무늬를 이루었다 시간은 촘촘하지 않고 순간은 아질아질해서 그 틈에 발이 빠진 적도 있었다 그 무늬에 넋을 빼앗겨 한데 어룽진 적도 있었다 기다리는 것 찾아오는 사람 문이 열렸다 공기가 들어왔다 몇 개의 단어가 사연을 품고 따라 들어왔다 하나의 몸뚱이에서 겹침이 일어났다 시간이 오직 순간이던 때가 있었다 순간이 시간을 꽉 채우던 때가 있었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벌써 찾아오고 난 뒤에 아직 기다리는 움직임이 있었다 충만한 상실감이 있었다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 시인선 488 문학과지성사 = 그 공격 앞에 속수무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