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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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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와 '여성' 한겨레 강남역 살인사건이 뜻밖의 양상으로 치닫고있다. 뚯밖이 아니라 어쩌면 예견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으로 본격화된 여혐, 여혐혐, 남혐 등이 음지라면 음지일 온라인상에서 폭발적으로 과열되면서 분출구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회원들, 극성 페미니스트들의 논쟁이 아니라 모든 여성 개개인이 짊어진 문제라는 점을 상기할만 계기가 있어야했다. 이 기형적인 젠더 담론이 액션으로 체화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다음 단계'였다. 이 단계를 겪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매우 흥미롭다. 평소 유보해왔던 '여성주의'나 '젠더'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기엔 아주 알맞은 때라는 확신이 생겨 되는대로 정리해본다. 우선 그동안 용어의 모호함이 갈등을 증폭시켜왔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논쟁의 한가운데 선 단어는 '여성혐오 (여혐)'이다. 우리말 '혐오'가 주는 특유의 의미에다가 일베와 메갈리아의 대결 구도 속에서 '여혐'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본래 뜻보다도 거북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많은 부분이 생략되고 함축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건을 다루면서만큼은 ' Misogyny '라는 영어 단어로 대신해봤으면 한다. Misogyny는 여성에 대한 혐오, 증오는 물론 차별, 비하같은 보다 넓은 범위의 개념을 내포한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대하지 않고 객체로 여기는데서 비롯되는 모든 불합리와 사소한 습관,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폭력, 가부장주의 등이 모두 해당한다. "'김여사'가 차를 몰고 나왔다", "어디 여자가 함부로 나서", "선머슴같고 여성스럽지 못해", "조신하지 못한 옷차림을 하면 성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당연히 딸이 해야지", &q

어느 대기업이 노동취약계층을 평가하는 방식

지난달 18일과 이달 14일 각각 다른 지점에서 스마트폰 수리를 받았다. 2월에는 액정을 바꾸느라 돈이 좀 들었지만 기기내부 청소 같은 걸 서비스로 받았다. 엊그제는 통화 품질 때문에 갔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했다. 대신 후면 카메라 유리를 교체하고 액정보호필름까지 부착해줬다. 모두 무료였다.  당일 저녁마다 수리기사로부터 장문의 문자메세지가 왔다. 기기에 문제가 없는지 수리하면서 불편한 건 없었는지 물었다. 휴대폰 관리를 위한 팁과 환절기 건강 챙기라는 따듯한 인사도 함께였다. 혹시 본사에서 만족도 조사 전화가 오면 잘 대답해 달라는 당부도 있었다.  내가 모두에게 10점 만점에 10점을 준 것은 분명 그런 당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번 다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그 문을 다시 나설때까지 훌륭한 서비스를 받았다. 고마웠고 만족스러웠다. 과분한 친절이었다. 기술자들이 생계를 위해 떠안은 감정노동이 버거워보이기도 했다.  오늘 본사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2월 18일에 대한 거였다. 10점을 내리 불렀다. 혹시 수리기사가 평가를 잘 해달라고 했냐는 게 마지막 질문이었다. 대답하고 나서야 정답이 있는건가 해서 아차 싶었다. 이런 부탁을 한 사실로 기사님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느냐고 했더니 그렇단다. 할 일을 안하고 고객을 협박한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고 따졌다. 규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애초에 저런 규정이 있었는지, 생겼다 한들 저들이 직원들에게 과연 공지라도 했을지 못미덥다. 유도심문을 당한 것 같아 불쾌하다. 속상하고 미안하다. 생업에 최선을 다한 기사님이 나때문에 안 좋은 일을 당할까봐. 무심하게 훑어넘겼던 기사 여러개가 떠오른다. 이 기업이 노동자를 부품 쯤으로 여기는 걸로 악명높은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정말 화가 난다. 내가 이따금씩 사소한 일에도 몸서리치는 분노조절 장애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여기까지 삼성전자라고 말 안했다. 그래도 모두가 알 테니까. 다음엔 절대 갤럭시 안 산다. http://m.me

정의를 부탁해, 권석천

정의를 부탁해  권석천의 시각 저자   권석천 | 동아시아   | 2015.11.03 자신이 소속되지 않은 계층의 고통에도 공감할 수 있었던 그때, 그 분열의 감수성 말이다. 보수진보의 깃발이 구심력을 잃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의 희망은 그렇게 작은 분열들에서 싹틀지 모른다. p.49, <성공담이 듣고 싶은 당신께> 인간은 말(언어)의 포로다. 세상에 나와 배우고 익힌 말로 생각하고, 대화하고, 글을 쓴다. 그래서 말을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권력은 총구(銃口)가 아닌 말에서 나온다. p.73, <'공권력'을 민영화하라> 법을 배운 자들이 저러할진대 누구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할 건가. 법도 끝까지 우기면 되는 건가.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그런 수군거림이 무섭고 두렵다. p.163, <국정원 청문회의 검투사들> 정권 전반기,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 '순한 양'이었다가 후반기에는 죽어가는 권력 앞에서 '호랑이의 이빨'을 드러내곤 했다. 그 과정에서 수사권과 기소권이 일그러지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것이 과연 개개인의 출세욕과 얼마나 분리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p.212, <'펀치' 검사들이 사는 법> 진실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한 사회가 진실을 끝까지 가리지 않고 '편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 판사는 여론에 휘둘려서도, 재판 원칙 뒤에 숨어서도 안 된다. 끊임없이 불편해야 하고, 그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헌법이 판사의 신분을 보장해 주는 이유다.  p.257, <낙지 살인, 그 편한 진실> 민주화와 정의를 향한 여정은 나의 오른팔을 없앤 자에게 왼손을 내미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오직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p.383, <원칙이 우릴 삼킬지라도> = 뭇 주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