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해피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나가고 난 뒤에도 저 불은 우리의 예상보다 좀더 오랫동안 타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안에서. 내부에서. 그 깊은 곳에서. 어쩌면 우리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도. 이 우주의 90퍼센트는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물론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 불들을 보지 못하겠지만. (p.22)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p.81)
맞아요. 그랬어요. 십 년은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봤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같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p.47)
-세계의 끝 여자친구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우리의 꿈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뤄지지 않은 소망들은 모두 그처럼 대단한 것들이었다. (p.95)
그 시절에 우린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우린 세상 모든 사람인 양 행동할 수 있었다. 언젠가 종현이 말한 것처럼 우린 하루 스물네 시간을 1440개의 아름다운 일 분들로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염없이 떨어지는 벚꽃잎들을 바라보며 하루 1440개의 아름다운 일 분들에 대해서 종현이 말하던 그 봄날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p.98)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우연이야. 시골이라면 자연이겠지만, 도시에서는 우연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만날 때는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들처럼 만난다. 인연에는 우연이 없다." (p.104)
이렇게 거대한 도시에 사는 한, 하루에 두 번씩 평생 택시를 탄다고 해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같은 택시를 탙 수 없는데, 그런데도 때로 우리는 원래 만나기로 한 것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또 사랑에 빠지고, 코발트블루에서 역청빛으로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광할한 밤하늘 속으로 머리를 불쑥 밀어넣는 것과 같은 황홀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이 도시와 청춘의 우리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리라.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극한의 절망과 다른 선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완강하고도 그만큼 멍청한 확신 사이를 한없이 오가면서 그 무엇도 아닌 존재에서 이 세상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어떤 사람들....... 이 도시에서 맞이하는 하루 1440개의 순간들은 모두 똑같이 아름다웠다. 60초든, 1000분의 1초든, 모든 풍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변하는 청춘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p.107-108)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결국 인생이란 리 선생의 공책들처럼 단 한 번 씌어지는 게 아니라 매순간 고쳐지는 것, 그러니까 인생을 논리적으로 회고할 수는 있어도 논리적으로 예견할 수는 없다는 것. (p.224)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 우리는 하늘을 봤고 우리는 별을 봤고 우리는 바다를 봤지. 하지만 결국에 우리가 보게 되는 건 자신이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너는 너만을 이해했을 뿐이야. 음식을 맛볼 때, 너는 차이를 맛보는 거지. 그 미각을 맛보는 게 아닐 수도 있어. 재클린만 해도" (p.225-226)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우연한 일들은 언제나 징후를 드러내는 오랜 기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설사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실연의 고통에 잠겨서 죽지 않고 살아나기 위해서는 그렇다고 인정해야만 햇다. 예기치 않게 쏟아진 함박눈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시작된 우리의 사랑은 또 그만큼이나 느닷없이 끝나버렸다. (p.239)
"...사랑은 질병 같은 것일 거야. 맞아. 우린 1982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시합을 벌이다가 14라운드에 링에서 쓰러져 죽은 한 권투선수 때문에 서로 사랑하기 시작해서 2001년 9.11 테러로 무너진 쌍둥이빌딩 때문에 이별하게 된 거야. 그건 우리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했고 아무런 이유 없이 이별했다는 소리이기도 하지. 이제 나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어...." (p.248-249)
-달로 간 코미디언



=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정녕, 모든 슬픔은 견뎌질 수 있는 것일까.

곧 시작되려고하는, 어쩌면 시작됐을지도 모르는 내 슬픔 역시 이미 이야기의 탈을 쓰고 정체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견뎌낼 만 한 것일까. 나는 아직 그 정도까지 이해할 나이가 되지 못했다. 나이가 차오른다고 해도 대부분의 것들을 알지 못한채 나는 그대로 헛똑똑이일 것이다. 내 감정조차 추스리지 못하면서 멋대로 누군가의 감정을 가늠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지 못하고 이대로 고민의 끈을 놓아버리고만 싶다. 충분히 노력했다고 어쩌면 나는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작가의 말을 곱씹어본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2013. 11. 30~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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