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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이병률 종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한때는 돌을 잘 다루는 이 되고도 싶었는데 이젠 다 집어치우고 아주 넓은 등 하나를 가져 달(月)도 착란도 내려놓고 기대봤으면 아주 넓고 얼얼한 등이 있어 가끔은 사원처럼 뒤돌아봐도 되겠다 싶은데 오래 울 양으로 강물 다 흘려보내고 손도 바람에 씻어 말리고 내 넓은 등짝에 얼굴을 묻고 한 삼백년 등이 다 닳도록 얼굴을 묻고 종이를 잊고 나무도 돌도 잊고 아주 넓은 등에 기대 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으면 = 착란(錯亂). 그건 1025일간의 착란이었다. 내가 너무 어리고, 미숙하고, 손쉽고, 순진해서, 그래서 열병처럼 겪은 착란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왔다. 모든 지난 날의 실체와, 낯설기만 한 그의 정체와, 그 사이에서 애써 위안하며 외면해온 나의 질병이 까발려졌다. 갑작스러웠으나, 차라리 선물이었다. 청춘의 낭비는 이로써 충분했다.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무의미하게 앓지도, 잃지도, 울지도 않을 것이다.

김사인, 화양연화

화양연화(花樣年華)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못내 영원하지 못하고 져버린 것들에 대한 꾸밈없는 작별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