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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이장욱 무섭다 결국 그곳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섭다 마음이 무섭고 몸이 무섭고 싹 트고 잎 피고 언제나 저절로 흐드러지다가 바람 불어 지는 내 마음속 꽃잎 꽃잎, 그대가 무섭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하나의 고요한 세상을 지니고 있으니, 무섭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끄는 매혹에 최선을 다해 복종하였으므로 내 고요한 세상에 피고 지는 아름다운 모반을 주시하였다 그대가 처연히 휘날려 내 몸과 마음이 어지러울 때 단 한번도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흘러가는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기억을 만나면 기억을 죽이고 불안을 만나면 불안을 죽이고, 그러므로 이제 이 눈과 코와 입과 귀를 막아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시길 그대에게 익숙한 세상으로 나를 인도하여 그대 몸과 마음에 피고 지는 싹과 잎과 꽃이 되게 하시길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이 고요한 세상을 처연히 흩날리도록, 내 몸과 마음의 꽃잎 꽃잎 피고 지는 그곳에 기다리는 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이장욱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의 시 111 = 이미 흐드러진 마음을 지키기 위해 의심 없이 흔들림 없이 기억과 불안을 죽이며 견디는 것. 나약하나 고귀하다.

스토리텔링 애니멀,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 조너선 갓셜 / 노승영 옮김 / 민음사 우리가 셰익스피어 연극을 관람하며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케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우리의 정신을 확장하거나, 인간 조건을 탐구하거나, 숭고한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뿅 가기 위해서이다. p.51 따라서 이 논리를 따르자면 우리가 이야기를 추구하는 것은 이야기를 즐기기 때문이지만, 이야기를 즐기도록 자연이 우리를 설계한 이유는 연습의 유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픽션은 인간의 문제를 시뮬레이션 하는 데 특화된 아주 오래된 가상 현실 기술이라는 것이다. p.85 꿈의 학문적 정의는 "서사 구조가 있는 감각 운동의 환각"이다. 꿈은 사실상 밤의 이야기이다. p.99 제임스 틸리 매슈스의 터무니없는 환상에서 보듯 병든 마음은 감각을 복잡하게 짜 맞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 우리의 마음 또한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자료로부터 의미를 추출해 내려고 끊임없이 애쓴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편집성 정신 분열병 환자의 이야기처럼 극적으로 일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곧잘 일탈한다. 이것은 이야기하는 마음을 얻은 대가이다. p.126 이야기하는 마음은 중대한 진화적 적응이다. 그 덕에 우리는 사럼을 일관되고 질서 정연하고 의미있게 경험한다. 삶이 지독하고 소란스러운 혼란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마음은 완벽하지 않다. ... 이야기하는 마음은 의미 중독자이다. 이야기하는 마음은 세상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내지 못하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려 든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는 마음은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때는 진짜 이야기를, 그럴 수 없을 때는 가짜 이야기를 제조하는 공장이다. p.133 달리 말하자면, 미래처럼 과거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 다 마음속에서 창조한 환상이다. 미래는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머릿속에서 돌리는 확률 시뮬레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민음사 어떻게 보면 박맹호 회장이나 강태형 대표는, 목적도 관심사도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발견하고 키우고자 했던 것은 '재능'이었다. 한 명의 뛰어난 소설 천재를 발굴할 수 있다면 그 비용은 거액이 들어도 아깝지 않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진흙 속의 천재를 평론가가 더 잘 알아볼 수 잇는 시대인지, 그렇지 않은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달랐을 뿐이다. ...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림 백 점, 천 점을 모았다고 해서 그게 <모나리자>나 <게르니카>보다 귀하다고 할 화가나 미술평론가는 없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엘리트주의자다. p.88 과거제도는 사회의 창조적 역동성을 막았다. 이 제도는 블랙홀처럼 온 나라의 젊음과 재능을 빨아들였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시험만 잘 치면 순식간에 기득권 핵심부에 들어설 수 있다는 약속만큼 달콤한 것도 없다. 유능한 청년들이 자기 주변에 있는 중소 규모의 지적, 산업적 프로젝트에서 관심을 거두고 중앙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통과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p.101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NRF 출판사에 보냈다. NRF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거절했는데, 그런 판단을 내린 사람은 편집장으로 일하던 앙드레 지드였다. ... 2017년에는 프랑스 작가 두 사람이 198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클로드 시몽의 소설 일부를 발췌해 출판사 열아홉 곳에 보냈다. 그랬더니 일곱 곳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오지 않았고, 열두 곳은 출간 거절 의사를 밝혔다. p.184 공모전 심사는 공정하다고 본다. 형식적, 절차적인 면에서 공정하다. 공정함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때로는 신인 선발 제도에서도 실질적, 결과적 공정함을 논해야 할 수 있다. ... 그러나 장편소설공모전에서 우리가 따질 수 있는 것은 형식적, 절차적 공정성뿐이다. p.269 여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