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허수경인 게시물 표시

허수경, 공터의 사랑

공터의 사랑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 공터에 무지개를 띄우고, 잊었던 꿈을 앓는 일

허수경, 불취불귀

불취불귀 허수경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 잔뜩 취한 채 봄의 끝자락을 비틀거리는 것 같은 애달픔이었다.  완전히 무너진채로 미친듯이 써내려갔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시인 언니와 한잔 기울이고 싶었다. 특히 이 시를 여러번 읽었다. 동사서독을 영화관에서 보던 날의 기억들이 비틀비틀 마음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