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이장욱인 게시물 표시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이장욱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이장욱 / 문학동네 맨해튼 미드타운, 내 청춘의 어두운 시절을 보낸 그 좁고 낡은 아파트먼트의 쪽창으로 떨어지는 낙엽의 궤적을 이해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나는 이 시의 어휘 하나하나를 조사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을 듯한 기분. 마치 이 시가 쓰이기 이전에 이미 이 시를 알고 있던 것처럼, 모든 문장들을 한 올 한 올 이해할 것 같은 느낌. 지금은 그것만이 나의 리듬. 지금은 그것만이 나의 슬픔. 아니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데, 사실 그녀가 적는 모든 문장은 허술한 농담 같으면서도 동시에 농담일 수 없을 만큼 정교하기도 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농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과 비슷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은 여전히 이 세계를 살아가겠죠. 저 역시 어디서든 당신을 생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글을 일고 당신도 언젠가 다시 나의 글을 읽을 거예요. 그것으로 문장들의 아름다운 우주 같은 게 이루어지리라는 달콤한 말은 믿지 마시길. 우리는 그저 앙상하고 외로워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안간힘을 다해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채워줄 뿐이니까요. 그리고 스르르, 사라지는 거예요. 영원의 이야기란 언제나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한답니다. 오늘 아침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나는 미국 맨해튼에도 가보지 못했고 티벳 라싸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어쩐지 그 세계의 뒷골목에 떨어지는 낙엽의 궤적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 늦은 시간에 일어나 잠시 스트레칭 자세를 취한 뒤 슈만의 환상 소곡집을 틀어놓고 맞은편 빌라의 외벽에 가로막혀 있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 이런 순간에는 갑자기 인생이 정지해서 다시 시작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느낌. 마커스 밀러로 음악을 바꾸고 몸을 흔들어도 영영 깊은 물속 같은 기분은 마찬가지. 이것이 오늘의 기분.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회계장부라든가 복식부기는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세계입니

이장욱,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이장욱 무섭다 결국 그곳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섭다 마음이 무섭고 몸이 무섭고 싹 트고 잎 피고 언제나 저절로 흐드러지다가 바람 불어 지는 내 마음속 꽃잎 꽃잎, 그대가 무섭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하나의 고요한 세상을 지니고 있으니, 무섭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끄는 매혹에 최선을 다해 복종하였으므로 내 고요한 세상에 피고 지는 아름다운 모반을 주시하였다 그대가 처연히 휘날려 내 몸과 마음이 어지러울 때 단 한번도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흘러가는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기억을 만나면 기억을 죽이고 불안을 만나면 불안을 죽이고, 그러므로 이제 이 눈과 코와 입과 귀를 막아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시길 그대에게 익숙한 세상으로 나를 인도하여 그대 몸과 마음에 피고 지는 싹과 잎과 꽃이 되게 하시길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이 고요한 세상을 처연히 흩날리도록, 내 몸과 마음의 꽃잎 꽃잎 피고 지는 그곳에 기다리는 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이장욱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의 시 111 = 이미 흐드러진 마음을 지키기 위해 의심 없이 흔들림 없이 기억과 불안을 죽이며 견디는 것. 나약하나 고귀하다.

이장욱, 얼음처럼

이미지
얼음처럼 이장욱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나는 자꾸 물과 멀어졌으며 매우 견고한 침묵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끝까지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저 너머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들을. 그것은 꽉 쥔 주먹이라든가 텅 빈 손바닥 같은 것일까? 길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지상을 겨누거나 폭설처럼 모든 걸 덮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위바위보는 아니다. 맹세도 아니다.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 아침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사> = 이장욱 시인의 시집.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곱씹으며 읽을 수 밖에 없는 시들이 즐비했다. 한 편 한 편, 문장마다 들어선 시어들은 단정하고도 깊숙하게 마음을 울렸다. '얼음처럼'이라는 이 시에 시집의 제목이 등장한다. 겨울에 읽으니 계절감이 더했다. 알 수 없이 모호한 것들, 모든 것이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각자의 내면에서 차츰 투명해지고 또 단단해진다.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려한 시들 가운데서 유독 표지에 적힌 시인의 말이 와닿았다. 아래와 같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고 중얼거렸다. 그것이 차라리 영원의 말이었다. 물끄러미 자정의 문장을 썼다. 나는 의욕을 가질 것이다." 참고로 읽음직한 한겨레 토요판 시 코너의 이장욱 시인 글. '책보다 소중한 것들'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장욱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장욱 문학과 지성사(2015) 아름다운 건, 하루오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그게 하루오의 말이었는데, 어딘지 건조한 그 말이 그때는 아주 조용하고 희박한 공기처럼 느껴져서, 뭐라고 더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녀가 젖은 눈을 손바닥으로 받으며 가만히 말했다. 작은 사랑이 하나 지나간 느낌이었어....... 라고. p.36 <절반 이상의 하루오> 그에게 혼잣말을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자신이 고독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죽은 사람들은 언제든 영화처럼 돌려볼 수 있어서 좋다......고, 알은 또 엉뚱한 말을 중얼거렸다. 생각이 먼저 있어서 말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온 뒤에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p.81 이름이란, 아무렇게나 흐르지 않도록 사람을 붙들어두는 작은 닻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p.86 니콜라의 말투에 약간의 슬픔이 배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이미 익숙해져서 몸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좋은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은 체온에 가까워서 아무리 반복해도 더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은 알고 있었다. p.88 <올드 맨 리버>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생이 아니다.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때문에,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나에게 얘기하는 것인지 황혼에게 얘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p.127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그녀는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불꽃이 점화되었다가 천천히 식어가는 과정이라고 믿는 낭만적 허무주의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정귀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귀보 씨는...... 멀리 있어야만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 정귀보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남긴 말은 여러 면에서 암시적인 것이었다. 안녕. 아름다운 동화에서 한 페이지를

이장욱, 좀비 산책

좀비 산책 이장욱 비가 내리자 나는 드디어 단순해졌다 당신을 잊고 잠깐 무표정하다가 아침을 먹고 잤다 낮에는 무한한 길을 걸어갔다 친구들은 호전적이거나 비관적이고 내 몸은 굳어갔다 한 사람을 살해하고 두 사람을 사랑하고 잠깐 울다가 음악을 들었다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나의 죽음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금욕적이며 장래 희망이 있다 1968년이 오자 프라하의 봄이 끝났다 레드 제플린이 결성되었다 김수영이 죽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여전히 태어나지 않았다 비가 내리자 나는 단순하게 잠깐 울다가 전진하였다 =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래 희망이라는 틀에 박힌 단어로 위안삼으면서. 울음조차 잠깐인 채로 그러나 무얼 위해 전진하는 지 모르는 상태로 그저 떠도는 것은 아닐까. 나의 사랑은, 나의 죽음은 변하지 않았나.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

정오의 희망곡 이장욱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갔다 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거리에는 키스신이 그려진 극장 간판이 걸려 있고 가을은 순조롭게 깊어갔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 =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천국보다 낯선, 이장욱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떨어진다. 행인들이 우산을 펴 드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자사로, 다른 표정으로, 다른 각도로, 우산을 펴 든다. 풍경이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 나는 인생이라는 단어에 호의적인 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인생도 멸시받아서는 안 되며, 각각의 인생은 각각의 방식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인생이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인생의 끝 역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어 슬픔을 표하는 것, 그것은 같은 시간을 지나온 인간으로서 불가피한 일이다. 그것 자체가 문명의 형식이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p.10~11 어떤 비극은 리듬조차 견디지 못한다. 그것이 리듬의 탓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비극의 탓은 더더욱 아니다. p.12 사랑은 때때로 우리를 구원하지만, 아니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세계의 진실이란 밤처럼 냉정한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사랑이 완전하게 사라진 상태에 가깝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 것은, 대개 이미 늦은 다음이지만. p.29 영혼의 거죽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고요한, 그러나 들끓는 심연이 있다. 그 심연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밤의 호수처럼 아름답고, 때로 밤의 늪처럼 두려울 뿐이다. 심연은 이 세계의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 심연, 호수, 늪을 기록하는 것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정치니 법이니 신문 기사 같은 것들의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실연 때문에 자살했다느니, 실업을 비관해 투신했다느니, 원한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느니 하는 말들을 거의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표면만을 부유하는 그 언어들을 인간에 대한 모독으로 느꼈기 때문에...... 소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