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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이장욱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이장욱 / 문학동네 맨해튼 미드타운, 내 청춘의 어두운 시절을 보낸 그 좁고 낡은 아파트먼트의 쪽창으로 떨어지는 낙엽의 궤적을 이해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나는 이 시의 어휘 하나하나를 조사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을 듯한 기분. 마치 이 시가 쓰이기 이전에 이미 이 시를 알고 있던 것처럼, 모든 문장들을 한 올 한 올 이해할 것 같은 느낌. 지금은 그것만이 나의 리듬. 지금은 그것만이 나의 슬픔. 아니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데, 사실 그녀가 적는 모든 문장은 허술한 농담 같으면서도 동시에 농담일 수 없을 만큼 정교하기도 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농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과 비슷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은 여전히 이 세계를 살아가겠죠. 저 역시 어디서든 당신을 생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글을 일고 당신도 언젠가 다시 나의 글을 읽을 거예요. 그것으로 문장들의 아름다운 우주 같은 게 이루어지리라는 달콤한 말은 믿지 마시길. 우리는 그저 앙상하고 외로워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안간힘을 다해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채워줄 뿐이니까요. 그리고 스르르, 사라지는 거예요. 영원의 이야기란 언제나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한답니다. 오늘 아침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나는 미국 맨해튼에도 가보지 못했고 티벳 라싸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어쩐지 그 세계의 뒷골목에 떨어지는 낙엽의 궤적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 늦은 시간에 일어나 잠시 스트레칭 자세를 취한 뒤 슈만의 환상 소곡집을 틀어놓고 맞은편 빌라의 외벽에 가로막혀 있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 이런 순간에는 갑자기 인생이 정지해서 다시 시작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느낌. 마커스 밀러로 음악을 바꾸고 몸을 흔들어도 영영 깊은 물속 같은 기분은 마찬가지. 이것이 오늘의 기분.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회계장부라든가 복식부기는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세계입니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 문학동네 <지나가는 밤>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무료하고 긴 하루하루로 이어진 시간, 아무리 노래를 부르고 그네를 타도, 공상에 빠져 이야기를 지어내도, 자신들이 작가이고 감독이고 배우이고 관객인 연극을 해도,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거리까지 달려간다고 해도 메워지지 않았던 커다랗고 텅 빈, 그 무용한 시절을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P. 97 얼마를 기다리든 결국 엄마는 왔다.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 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던 그때의 기다림을 윤희는 아프게 기억했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윤희야,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기다린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P. 99 <모래로 지은 집> 모래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전전긍긍하지 않고 애쓰지 않았다. 관대했다. 그 관대함은 더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비싼 자동차나 좋은 집보다도 더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P. 118 그때 나는 사랑이라는 말이 참 더럽다고 생각했어. 더러운 말이라고.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경멸하고 또 경멸할 거라고 다짐했어. 나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해. 어쩌면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무서운 일이라고,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알리바이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P. 156 그때 나는 공무와 포옹하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심보선 / 문학동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면서 - 그것이 시건 혹은 논문이건 - 깨닫게 되었다. 내가 선택하고 빠져드는 대상은 단순히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인간들의 탄식, 좌절, 환호성, 기쁨, 경탄이 어려 있는 세계라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이 세계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세계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그 세계와 연루된다는 것이고, 그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와 베버가 말하듯 삶과 글쓰기는 고독한 작업으로 시작하여 고독한 작업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그 출발과 회귀 사이에는 고독한 여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몸과 영혼을 뜨겁게 하고, 내 가슴 속에서 말을 들끓게 하고, 나의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순히 주제의 흥미로움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인들의 삶이고 그 삶에 섞여드는 사물들의 동시대적 운동이다. p.08-09 그렇다. 결국 모든 것은 영혼의 문제여야 한다. ... 영혼은 행복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러나 영혼은 행복을 귀중한 선물처럼 안절부절 다루지 않는다. 영혼은 불행에게도 손을 건넨다. 그리하여 영혼은 불행과 행복의 차이를 지우고 그 둘을 동등하게 만든다. ... 영혼은 의미와 무의미를 같은 장소로 데려온다. 영혼은 '행복하지만 삶의 의미에 무지한 아이'와 '불행하지만 삶의 의미에 도통한 노인'을 합체시켜서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킨다. 영혼은 오늘 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수렴시켜서 새로운 시간을 창조한다. 영혼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새로워진다. ... 영혼은 어쩌면 허튼소리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허튼소리다. 영혼은 불가능성에 대한 가장 경이로운 역설이요, 가장 아름다운 역설이다. 이 수수께기 같은 영혼 때문에 나는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다. 영혼 때문에 나는 시를 쓰고 시를 산다. p.22 일상생활에서의 '깊이 생각함'일나, 느긋하게 산책을 할 때라면 한 송이 꽃을 보고도 쉽게 느낄 공통성의 기초를, 생존

신철규, 눈물의 중력

눈물의 중력 신철규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고 밤은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 밖에 없다 눈을 감으면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닌다 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 그의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 못 박힐 손과 발을 몸안으로 말아넣고 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 밤은, 달이 뿔이 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시인선 096 =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는 슬픔.  손으로 눈물을 받으며 엎드려 우는 누군가의 모습을, 생전엔 만난 적 없던 어린 영혼들의 빈소에서 밤마다 매일 보아야 했던 때가 있었다.  신은 어쩌면 그 등마다 걸터앉아 있거나 땅으로 스미는 눈물을 함께 받치고 있었을텐데, 그들은 도대체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단단히 울었을 것이었다.  자려고 누워도 귀에서 울음소리가 떠나지 않던 날들이었다.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김희선/ 백수린/ 이주란/ 정영수/ 김봉곤/ 이미상 문학동네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도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P.24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P.82 망각조차도 내게는 일종의 부자유스러운 상황으로 진입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동안 나는 도대체 ㅜ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꿈꾸었던 것일까. ... 그가 나의 가장 뜨거운 조각들을 가져가버렸다는 사실을, 그로 말미암아 내 어떤 부분이 통째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을 후에야,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P.84 -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그날 언니와 나눈 대화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사실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그러니까,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P.156 - 백수린, <시간의 궤적> 나는 회의로 가득차 있었고, 어디에서든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라도 발견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희망이란 때때로 멀쩡하던 사람까지 절망에 빠뜨리곤 하지 않나? 아니 오로지 희망만이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게다가 희망은 사람을 좀 질리게 하는 면이 있는데, 우리들은 대체로 그런 탐스러워 보이는 어떤 것들 때문에 자주 진이 빠지고 영혼의 바닥을 보게 되고 회한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P.237 “우리 매년 여름마다 여기 올까?” 우리가 단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 없는 다음 여름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현수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 것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문학동네 <최미진은 어디로> 나는 나의 적의가 무서웠다. p.31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나는 그게 좀 서글프고, 부끄럽다. p.33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해본 적 없고, 사랑을 물리친 적도 없다. 바보처럼 병들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외로이 살아오지도 않았다. 나는 저 여자가 천치 같다고 여겨진다. 천치 같지만 마음이 쓰린 것은 맞는다. 그건 아마도 저 노래의 멜로디 때문이겠지. 내가 지금 저 노래를 떠올린 것은 어쩌면 가사가 아닌 멜로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나는 멜로디 때문에 가사에 속고 마니까. 멜로디 때문에 가사를 다르게 보니까. 지금 내 감정과 비슷한 것은, 여기에 적을수 없는 저 노래의 멜로디 뿐이다. p.153 왜 어떤 사람은 살인자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상이 되는 것인지. 왜 어떤 사람은 수치를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염치를 생각하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 p.167 <한정희와 나> 어수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때도 있었고, 이 세상에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썼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많이 쓰고자 했던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걸 쓰지 않는다면 작가가 또 무엇을 쓴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배웠고, 그런 소설들을 되풀이해서 읽었으며, 주변에 널려 있는 제각각의 고통에 대해서, 그 무게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하고자 노력했다. 그걸 쓰는 과정은 단 한 번도 즐겁지 않았다. 고통에 대해서 쓰는 시간들이었으니까......... 어느 땐 나도 모르는 감각이 나도 모르게 찾아와, 쓰고 있떤 문장 앞에서 쩔쩔맸던 적도 있었다. ... 작가는 숙련된 배우와도 같아서 고통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 그릴 때도 다음 장면을 먼저 계산해야 하고, 또 목소리 톤도

여름, 스피드, 김봉곤

여름, 스피드 김봉곤 / 문학동네 <컬리지 포크> 나는 더이상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실은 나를 자격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힘이 없다. 그 사실에 더 피로하고 울적해졌다. p.13 그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고 틀릴 거라면 예감하지 않았다. p.35 기억할 필요가 없었던 나날들에 대해 기억해야 할 순간이 왔다. 기억할 필요가 없었던 날들은 쓰지 않아도 되는 날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잠시 후 쓰지 않으면 살지 않았다, 고 말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건 비약이었다. 쓰지 않으면 살지 않았다고 말해버리는 건 어쩐지 내 삶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를 절하하는 건 얼마든 좋았지만 내 삶을 할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쓰지 않으면 살지 않았다고 한번쯤 우겨보고 싶었다. ... 나는 지난 몇 달간의 기억을 되살리며 글을 쓸 것이다. 이제 와서 그들처럼 쓸 수 없었지만, 그들만큼 아름답고 싶었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서는 왜 배길 수 없는 것인지, 무언의 안온함을 왜 견딜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이제는 말할 것이다. 도리 없이 지체 없이. 내가 가진 모든 패를 다 보여주지 않고서는 시작할 수 없다. 그건 페어한 게임도 나의 방식도 아니었다. 부디 나보다 나의 글이 더 진실할 수 있기를. 그의 뒷모습을 생각하면, 조금 더 그럴 수 있는 기분이 되었다.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 p.48-49 <여름, 스피드> 그러고는 계속해서 걸었다. 비척비척하면서, 시시덕거리면서, 손을 고쳐 쥐면서 걸었다. 또 너한테 말리는구나. 헷갈리게 흘리는 거 여전하네. 그렇지만 밤의 맥박으로 뚜벅뚜벅. p.85 영우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건 오직 한 사람이 날 거부한 것이었지만 나는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건 잘 구별이 되지 않을까. 그 마음이 나를 괴물로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애써 구별하지 않았을까.

쇼코의 미소, 최은영

쇼코의 미소 최은영/문학동네 <쇼코의 미소>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p.24-25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 p.34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사내답지 않다고 여기며 깔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런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어져나왔던 사랑의 흔적들이 있었다. p.47 <신짜오, 신짜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p.90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p.115 <한지와 영주> 언니의 목소리에 실린 분노에 가까운 두려움은 나의 오래된 주인이었으니까. 그 두려움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나를 추동했고 겉보기에는 그다지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 어른으로 키워냈다. 두려움은 내게 생긴 대로 살아서는

김민정,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김민정 지지난 겨울 경북 울진에서 돌을 주웠다 닭장 속에서 달걀을 꺼내듯 너는 조심스럽게 돌을 집어들었다 속살을 발리고 난 대게 다리 두 개가 V자 안테나처럼 돌의 양옆 모래 속에 꽂혀 있었다 눈사람의 몸통 같은 돌이었다 야호 하고 만세를 부르는 돌이었다 물을 채운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담그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냈는가 하면 물을 버린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놔두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내기도 했다 먹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밤이었다가 낮이었다가 사과 쪼개듯 시간을 반토막 낼 줄 아는 유일한 칼날이 실은 돌이었다 필요할 땐 주먹처럼 쥐라던 돌이었다 네게 던져진 적은 없으나 네게 물려본 적은 있는 돌이었다 제모로 면도가 불필요해진 턱주가리처럼 밋밋한 남성성을 오래 쓰다듬게 해서 물이 나오게도 하는 돌이었다 한창때의 울이들이라면 없을 수 없는 물이잖아, 안 그래 물은 죽은 사람이 하고 있는 얼굴을 몰라서 해도 해도 영 개운해질 수가 없는 게 세수라며 돌 위에 세숫비누를 올려둔 건 너였다 김을 담을 플라스틱 밀폐용기 뚜껑 위에 김이 나갈까 돌을 얹어둔 건 나였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 = 단지 제목에 이끌려 산 시집이었다. 이렇게 쉽게 시를 쓰나 싶기도 했고,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장난치듯 늘어놓은 일상의 조각들 틈바구니에서 간혹 싸르르한 시구들이 마음에 와닿았다.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6인/문학동네 1. <고두(叩頭)>, 임현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단다. p.10 *작가노트-두고두고 애매한 것들과 더불어, 선명하게 나쁜 것을 색출해내는 일만큼 복잡하게 나쁜 것을 감각해야 할 또다른 이유 중 하나는 분명하게 슬픈 사람들 사이에 민감하게 아픈 사람들도 있다는 점. 모호하게 다친 사람에게는 다른 종류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점. p.40 3. <문상>, 김금희 송 역시 그 일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마음이 난폭해지곤 했다. 그것은 실체가 있는 대상이 아니라 실체는 없지만 힘은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향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바람, 막 출발한 동대구행 KTX가 달리면서 일으키는 이 광포한 바람, 흩날리는, 승강장 사람들의 머리카락과 현수막, 그리고 바람이 멈춘 뒤 찾아오는 정적 사이에서 느껴지는, 살아 있다는 것. 진행되지만 실감할 수 없는 그것을 모멸하고 난폭하게 굴고 싶은 마음. p.95 송은 희극배우가 확실히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 나쁘냐면 지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옛일을 완전히 매듭짓고 끝내고 다음의 날들로 옮겨온 흔적이 없었다. 그의 날들은 그냥 과거와 과거가 이어져서 과거의 나쁨이 오늘의 나쁨으로 이어지고 그 나쁨이 계속되고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차피 나빠질 운명인 것이다. 선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선택되는 것이다. p.107 *작가노트-더이상 나쁘지 않은 날들 소설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나쁨'에 대한 지겨운 고백을 듣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울어야 할 일과 절대 울고 싶지 않은 일, 되돌려주고 싶은 모욕과 부끄러움, 한순간 광포한 것으로 변해버리는 환멸과 후회들이 차창 밖처럼 연속된다. 나는 누구나 아주 나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고 믿고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한계도 있을 것이다. p.119 4. <고요한 사건>,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기준영, 정용준, 장강명, 김솔, 최정화, 오한기 /문학동네 양희야, 양희야, 너 되게 멋있어졌다. 양희야, 양희야, 너, 꿈을 이뤘구나, 하는 말들을 떠올리다가 지웠다. 안녕이라는 말도 사랑했니 하는 말도 구해줘라는 말도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 필용은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p.43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그는 변화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때 모든 걸 정리해 진과 함께 홍콩에 가서 살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 생각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여서 낭만적인 데가 있었다. 그는 경솔한 사람처럼 그 생각의 낭만성을 읊었다. p.68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 기준영) 어쩌면 소설이라는 도구는 인간 군상 속에 매몰되어 있는 개인을 입체적으로 발굴해내는 흙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입체적 개인을 평면에 눌러 인간 군상 속에 숨기는 압착기인지도 모르겠다. p.203 (유럽식 독서법, 김솔) = 너무 한낮의 연애라니, 제목부터 마음을 이렇게 툭 건드려도 되나 싶다. 단편소설의 매력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하다 만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토막난듯한 이야기들의 여운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