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잡념인 게시물 표시

변명

이미지
오늘 하마터면 절필을 할 뻔했다. 절필을 하고 싶었다. 당해낼 수 없을 만큼 좋은 글을 만났기 때문이다. 간사한 마음이다. 거장의 반열에 드는 글쟁이들의 글을 읽을 때는 들지 않는. 닿을 듯 닿지 못할 것 같은 필력을 글을 읽어야 드는 그런 마음.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나 혹은 글쓰기를 좀 즐긴다는 사람들의 빼어난 문장을 보면 언제부터인가 탁 하고 끈을 놓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욕심은 나는데 자신은 없어서다. 한때는 닮고픈 글들을 보면 힘이 나곤 했었다. 어떤 이유로 이렇게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튀기는지 알 듯 하면서도 도무지 모르겠다. 이런 괴상한 직접적 심정들을 뒤로하고 훌훌 떠나버린 언니는 '내가 이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더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봐 괴로웠다는 식으로 회고했다. 그런 순간들이 내게도 찾아온다. 부쩍 빈도가 늘어난 지가 벌써 오래다. 그런데도 미동을 않고 있다. 나약함의 또다른 표출 방식이다. 발만 동동 구르게 된다. 동동 구르던 발 밑의 지반이 자꾸 약해지면 어느날 갑자기 흔적없이 끝없는 심연 속으로 허물어져내릴 것 같다. 겁이 난다.

환절기

여름에서 가을로, 네게서 내게로. 1. 여름이 꺾이는 광경을 봤다. 나는 막이 내리는 여름의 잔해를 눈으로 좇으며 잰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변하는 것에 대한 예의를 갖출 여유가 행인에게는 없다. 때맞춰 계절을 주입하는 사거리 빌딩에는 먼 이국 시인의 글귀가 걸렸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메리 올리버, 휘파람 부는 사람. 2. 하루 전에는 내 안에서 우주 하나가 산산히 부서졌다. 비로소 이별이었다. 걸음마다 헤어짐을 되새기며 주말 늦은 밤 지하철역을 무거운 걸음으로 내달렸다. 그동안 약간의 상처와 약간의 후회와 약간의 분노와 약간의 미련이 멋대로 뒤엉켰다. 설익은 감정들은 제각기 자리를 찾기 위해 내 좁은 맘 속을 헤맸다. 3. 가장 먼저 상실을 지우려 든 건 당사자들과 무관한, 조금은 사소한 존재였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앞선 여자에게 붙어있던 무당벌레. 조그맣고 새빨간 게 주황색 후드 티셔츠 모자 아래서 나타났다. 꽤나 분주하게 여자의 등부터 목과 머리 사이사이를 오갔지만 그녀는 기척이 없었다. 무당벌레가 꼭 내 모습 같았다. 눈물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