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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페터 한트케

어느 작가의 오후 페터 한트케 지음/홍성광 옮김/열린책들 언젠가, 거의 1년 동안 언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이래로 작가에게는 자신이 과거에 썼고, 앞으로 쓸 수 있다고 느낀 문장 모두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말로 표현되지 왆고 글로 쓰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언어가 그로 하여금 깊이 숨을 쉬게 했고, 그를 세계와 새롭게 맺어 주었다. p.11 예로부터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밖에 있을 때 바로 제자리에 있다고 느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p.15 펜을 눌러 쓴 것, 펜의 이중(二重)의 교미욕, 잉크가 튄 얼룩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격렬한 긴장. 종이는 늘 새롭게, 번번이, 헛되이 공격당하는 것 같았다. p.79 처음 글을 쓸 때 나는 내 안에 있는 세계를 상(像)들의 신뢰할 수 있는 연속으로 생각했다오. 나는 그 상들을 바라보고, 하나하나 묘사하기만 하면 되었지.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상들의 윤곽이 흐릿해졌고, 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또 귀 기울여 듣게 됐다오. p.106 그런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텍스트가 있는데 나만 빈손인 거야. 그런 상황에서 완전히 무감각한 문장으로 이미지도 리듬도 없이 꿈이 끝나 버렸을 때 나는 영원히 글스기를 금지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오. 더 이상 자기 텍스트를 가져서는 안 된다! p.108 나는 소설의 형식으로 시작했다! 계속한다. 그대로 놓아둔다. 반대하지 않는다. 서술한다. 전해 준다. 소재들의 가장 피상적인 부분을 계속 가공하고, 그 숨결을 느끼며, 그것을 다듬는 자가 되고자 한다. p.121 = 쓴다는 행위의 고통과 번뇌에 대한 이야기. 글쓰기라는 고요하고 열정적인 행위에 몰두하는 작가의 곁에서 그저 고요하게 흘러가는 일상들을 만났다.

인도 야상곡, 안토니오 타부키

인도 야상곡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박상진 번역/문학동네 나는 축구장처럼 넓은 로비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몸을 묻고서 호화로운 주위를 바라보았다. 바라본다는 순수한 행위 속에는 언제나 약간의 사디즘이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생각을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에는 뭔가 진실한 것이 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 흡족한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몸은 어떤 다른 곳, 어딘지 알지 못하는 곳에 있지만, 바라보는 두 눈만큼은 완벽하게 감각을 가동시킨다는 생각이었다. p.40 "인간의 육체는 그저 외양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그것은 우리의 실재를 가리고, 우리의 빛이나 우리의 그림자를 덧칠해버립니다." ... 무엇을 위한 건배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도 따라서 잔을 들며 말했다. "빛과 그림자를 위하여." p.56 "눈먼 과학은 볼모의 땅을 일구지요. 미친 믿음은 자기를 찬미하는 꿈을 먹고 삽니다. 새로운 신은 그저 하나의 말일 뿐입니다. 찾지도 말고 믿지도 마세요. 모든 건 감춰져 있습니다." p.64 산다는 건 그냥 우연이다. p.94 아마 어떤 과거, 뭔가에 대한 어떤 대답을 찾나봅니다. 옛날에 잃어버린 어떤 것을 움켜잡고 싶은 거겠지요. 어쨌든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찾고 있어요. 말하자면 마치 자기 자신을 찾는 것처럼 나를 찾고 있는 겁니다. 책들을 보면 그런 일은 숱하게 일어나지요. 그게 문학입니다. p.108 확대는 맥락을 변조하지요. 사물은 멀리서 봐야 해요. 선택된 부분은 신중히 보시기 바랍니다. p.115 = 어딘가 몽환적이고, 나른한 여행을 다녀온 기분. 덧없고 덧없다.

녹터널 애니멀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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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터널 애니멀스 Nocturnal Animals, 2016 드라마 ,  스릴러 미국 116분 2017 .01.11  개봉 톰 포드 에이미 아담스 (수잔),  제이크 질렌할 (에드워드) For Susan Susan, enjoy the absurdity of our world. It's a lot less painful.  Believe me, our world is a lot less painful than the real world. He's too weak for you. The things you love about him now are the things you'll hate. We all eventually turn into our mothers. REVENGE You're too weak.  Nobody can gets away what you did. Nobody, nobody, nobody.    When you love someone you have to be careful with it. You might never get it again. You can't just walk away from things all the time. I can shoot! = 예술가가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 로맨틱한 복수.  재능과 꿈으로부터, 사랑으로부터 현실을 좇아 달아났던 그녀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더이상 예술을 사랑하지조차 않다는 고백은 처절하다. 빛나는 것들을 버리고 달아난 현실이라는 곳은 더없이 삭막하고 수잔은 거기서 예술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다. 남편은 불륜에 빠져 있고.  그런 수잔 이름앞으로 그녀의 별명을 제목으로 내세운 초고가 도착했다. 자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기준영, 정용준, 장강명, 김솔, 최정화, 오한기 /문학동네 양희야, 양희야, 너 되게 멋있어졌다. 양희야, 양희야, 너, 꿈을 이뤘구나, 하는 말들을 떠올리다가 지웠다. 안녕이라는 말도 사랑했니 하는 말도 구해줘라는 말도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 필용은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p.43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그는 변화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때 모든 걸 정리해 진과 함께 홍콩에 가서 살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 생각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여서 낭만적인 데가 있었다. 그는 경솔한 사람처럼 그 생각의 낭만성을 읊었다. p.68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 기준영) 어쩌면 소설이라는 도구는 인간 군상 속에 매몰되어 있는 개인을 입체적으로 발굴해내는 흙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입체적 개인을 평면에 눌러 인간 군상 속에 숨기는 압착기인지도 모르겠다. p.203 (유럽식 독서법, 김솔) = 너무 한낮의 연애라니, 제목부터 마음을 이렇게 툭 건드려도 되나 싶다. 단편소설의 매력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하다 만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토막난듯한 이야기들의 여운이 참 좋다.

굿바이, 콜럼버스, 필립 로스

굿바이, 콜럼버스 필립로스/정영목옮김/문학동네 우리는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거무스름한 금 가까이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러다 이따금씩 의자로 돌아가 머뭇머뭇 우리가 서로에게 느끼기 시작한 감정을 재치 있으면서도 불안하면서도 다정한 찬가로 노래했다. 사실 입으로 말하기 전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런 감정을 만들어내고 소유하게 되었다. 우리는 낯설고 새로운 느낌을 휘저어 사랑을 닮은 거품 속에 집어넣었지만, 감히 그것을 너무 오래 가지고 놀지도 못했고, 그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지도 못했다. 자칫 납작해지거나 픽 하고 꺼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p.38 다음날은 바람이 가을을 실어오고 수양버들 가지들이 파팀킨의 집 앞 잔디밭을 만지작거렸다. 정오에 브렌다를 기차역까지 태워다주었고, 그녀는 나를 떠났다 . p.194 = 지난해 맹장 수술하면서 읽었다. 여러 단편 중에서도 책의 제목이 됐던 저 굿바이 콜럼버스가 제일 좋았다.  풋풋하고 뜨거운 청춘의 사랑이 흩어지는 과정을 덤덤하게 담아냈다.  그 덤덤함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된다. 사랑에 깊이 빠지는 순간이나 그런 감정이 다 지나고 모든게 끝나는 시점까지도.

플랫폼, 미셸 우엘벡

플랫폼 미셸우엘벡/김윤진 옮김/문학동네 "지금은 의심스러워.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 점점 더 자주 의심이 생겨." 며칠 후 똑같은 대화가 되풀이되었다.  p.264 나는 태국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내 주변에는 답답하고도 서글픈 장벽이 형성되었다. 내가 결코 아시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렇지만 그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세상을 산다. 그저 세상으로부터 먹을 것과 애무와 사랑만 얻으면 되는 것이다.  ... 사랑에 대해서는 말하기 힘들다. 나는 이제 확신한다. 내게 발레리는 찬란한 예외였을 뿐이라고. 그녀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고, 그것을 매우 신중하게 자신의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에 속했다. 그 일은 참으로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그 속에는 행복과 솔직함과 기쁨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만일 내가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 나머지를 이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p.466 이제 나는 죽음을 이해했다. 죽음이 내게 크게 고통스러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증오, 경멸, 노화 그 밖에 여러가지 것들을 겪었다. 심지어 짧은 사랑의 순간도 있었다. 내게서 살아남을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그 무엇이 살아남는 것 또한 내게 마땅치 않다. 나는 어느 모로 보나 보잘것없는 개별적인 존재일 것이다. p.467-468 = '논쟁적인 작가' 라더니만. 실로 논쟁적인 소설이었다. 한없이 염세적이기도 했다. 오리엔탈리즘에 성적으로만 매료된 것으로 보이는 남자주인공의 시선이 꽤 불편했다. 갑작스럽게 여행산업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좀 따분하기도 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주인공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대목은 당황스러웠다. 이 소설 대체

마사지사, 비페이위

마사지사 비페이위/문현선옮김/문학동네 이런 생각들이 사람들을 미치게 했다. 사람들이 미치니 돈도 미쳤다. 돈이 미치니 사람들은 더 미쳤다. 미친 사람은  쉽게 지친다. 지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중국 전통 마사지 추나가 의심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p.16 자본의 원시축적을 위한 사푸밍의 파란만장한 노정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원시축적이 죄악을 동반한다고 말했다. 사푸밍의 경우에는 죄악을 동반할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조건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의 자본의 원시축적이 동반한 것은 희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건강을 희생했다. p.54 부자는 도시와 도시 사이를, 병원과 병원 사이를 돌아다녔다. 어린 샤오마는 줄곧 길 위에 있었고, 매번 목적지가 아닌 절망에 도달했다. p.70 사랑은 천리 둑이 개미굴 하나에 무너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개미와 같다. 샤오쿵은 자신의 천리 둑에 아주아주 작은 구멍을 하나 냈을 뿐이었다. 나중에 가서 어떻게 막아보려는 마음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샤오쿵은 울어버렸다. 실컷 울고 난 뒤에는 사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p.138 진옌은 굳게 믿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심장은 뛰고 있는 매 순간마다 의미를 가진다고.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그녀의 연인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온다고. 가까이, 좀더 가까이, 조금 더, 더 가까이. p.161-162 책에선, 아름다움은 숭고함이라 한다. 숭고함이라나 무엇인가? 책에선, 아름다움은 온유함이라 한다. 온유함이란 무엇인가? 책에선, 아름다움은 조화로움이라 한다. 조화로움이란 무엇인가? 고귀한 순수란 뭘까? 위대한 고요는? 장엄함은 무엇이고 화려함은 또 뭘까? 섬세한 정교함은 무엇이며, 아득한 오묘함이란 뭘까? 물빛이 반짝이며 빛난다는 것은? 산빛이 아련하다는 것은 뭘까? ... 맹인들은 이 세계를 '사용'할 뿐, 이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적과흑, 스탕달

적과흑 스탕달 문학동네(2014) VOLUME 1# 이런 연극이 한바탕 벌어지는 동안, 레날 부인은 십이 년 동안이나 자기의 반려자였던 남자의 뚜렷한 현실적 불행에 한두 번 동정심을 느낄 뻔했다. 그러나 진정한 정열은 이기적이다. p.209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으리라. 그것은 아름다움을 사랑하도록 태어난 영혼에 추잡한 것이 불러일으킨 강렬한 인상이다, 라고. 아마도 잘못 봤겠지만. p.265 VOLUME 2# "'항상 남이 기대하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라.'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유일한 종교입니다. 열광해서도 안 되고 거짓으로 꾸며도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늘 당신에게 열광과 허식을 기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교훈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지요." p.89 그렇지만 삶의 종말이 아주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안 뒤에야 인생을 즐기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p.399 나는 그 신을 사랑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그 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 신은 무자비하다(그러면서 그는 성서의 몇몇 구절을 상기했다). 그 신은 내게 끔찍한 방식으로 벌을 줄 거야....... 하지만 만일 내가 페늘롱의 신을 만난다면! 그 신은 아마도 내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너는 많이 사랑했으니 많이 용서받으리라......" p.414 법이 존재하기 전에는 사자의 힘이나 춥고 배고픈 존재의 욕망, 요컨대 '욕망'만이 자연스럽다...... 그렇다, 존경받는 사람들이란 다행히도 현행범으로 붙잡히지 않은 사기꾼들일 뿐이다. p.437 나는 진실을 사랑했다....... 그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도처에 위선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협잡뿐. 가장 덕망 높은 사람들에게도, 가장 위대한 인물들에게도. 그리하여 그의 입술에 역겨움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다, 인간은 인간을 믿을 수 없다.

세렐렘, 나더쉬 피테르

세렐렘 나더쉬 피테르 arte(2014) 기다림은 멋진 차원이다. 그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과 무언가가 가능한 어떤 것을 동시에 찾을 수 있다. 상상할 수 없는 것과 상상할 수 있는것. p.13 삶의 본능은 여전히 내가 그것을 붙잡기를 명하지만, 나의 거짓말은 교활하게도 나를 목적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이미 붙잡을 것들이 없는데도, 부질없이 그것에 매달린다. 나의 비겁함과 유연함의 최종 결과물. 내가 나라는 것으로 나는 발가벗겨졌다. p.112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p.119 = 읽을수록 뭔가에 도취되는 느낌. 문장이 흐름없이 분산하는 의식을 따라 펼쳐진다. 난해하고 요모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 미셸 투르니에 (Michel Tournier) 민음사(2012) 주의력의 한계는 점점 깊어지는 동시에 좁아졌다. 이젠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골몰한 한 가지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옮겨 가는 일마저 점점 더 어려워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타인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강력한 주의력 전환 요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45 오직 과거만이 중요한 존재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현재는 추억의 샘, 과거의 생산 공장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산다는 것은 오직 그 값진 과거의 자산을 늘리기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죽음이 오는 것이었다. 죽음은 그 축적된 금광을 향유할 수 있는 순간에만 진정한 죽음이었다. 우리가 소란스러운 현재 속에서 보다 더 깊이 있게, 주의 깊게, 현명하게 감각적으로 삶을 음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다. p.50-51 글을 쓴다는 이 성스러운 행위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갑자기 지금까지 빠져 있었던 동물성의 심연으로부터 반쯤 헤어 나와 정신세계로 진입한 느낌이었다. ... 그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그가 수치스럽게 여기고 잊어버리고자 하는 실수의 시절이 지나간 다음 이 섬에서의 진정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p.56 나의 상황은 미덕에 최대를, 악덕에 최소를 걸며 용기와 힘과 자기 긍정과 사물들에 대한 지배를 미덕이라고 부르기를 요구한다. 악덕은 포기와 체념, 즉 진창이다. 그것은 아마 기독교 저 너머 인간적 지혜의 고대적 비전으로 되돌아가서 오늘의 미덕(Vertu)에 고대의 덕성(Virtus)을 대체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어떤 기독교의 심저에는 자연과 사물에 대한 근원적 거부가 도사리고 있다. 나는 스페란차에 대하여 그 거부를 지나치게 실천에 옮겼던 것인데 그것은 나의 멸망을 초래할 뻔했다. 반대로 나는 오직 이 섬을 받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Aimer-vous Brahms... (민음사)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는 포도주를 한 모금 길게 마셨다. 폴을 반박하지 않았다. p.43-44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짧은 그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 뿐인지도 몰랐다. p.56-57 그에게 인생이라는 걸 가르치는 데는 시간이 자신보다 더 유능하겠지만, 그러려면 훨씬 오래 걸리리라.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Rue des boutiques obscures, Patrick Modiano (문학동네) 그 건물들의 입구에서는 아직도 옛날에 그곳을 건너질러 가는 습관을 익혔다가 그후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남긴 발소리의 메아리가 들릴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이.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느느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p.130 잠시 동안 나의 생각은 함수호로부터 멀리 세게의 다른 끝, 오랜 엣날에 그 사진을 찍었던 러시아의 남쪽 어느 휴양지로 나를 실어갔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그 소녀는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이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p.262 =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이 내게서 말소된 뒤에도 나를 나로 칭할 수 있을 것인가. 시간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그렇게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Der Dooppelganger, Jose Saramago (해냄) 하지만 사람들이 개를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하는 것처럼, 질서와 순서도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비록 질서와 순서도 개처럼 가끔 사람을 물기도 하지만 말이다. p.71 일초, 일초 시간이 흐를 때마다 문이 열려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이 앞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방금 한 말의 모순적인 본질에 맞서자면, 미래는 그저 광대한 허공일 뿐이며 영원한 현재의 먹이가 되는 시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p.291 그러면 그의 아내가 물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당신한테는 적이 하나도 없는데. 안토니오 클라로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고 대신 적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적은 적을 갖겠다는 우리의 의지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를 갖겠다는 적 자신의 저항할 수 없는 욕망에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p.313 = 실존에 예상치 못한 위협이 들이닥쳤을 때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라는 믿음이 주는 위안은 얼마나 큰지.

천국보다 낯선, 이장욱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떨어진다. 행인들이 우산을 펴 드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자사로, 다른 표정으로, 다른 각도로, 우산을 펴 든다. 풍경이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 나는 인생이라는 단어에 호의적인 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인생도 멸시받아서는 안 되며, 각각의 인생은 각각의 방식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인생이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인생의 끝 역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어 슬픔을 표하는 것, 그것은 같은 시간을 지나온 인간으로서 불가피한 일이다. 그것 자체가 문명의 형식이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p.10~11 어떤 비극은 리듬조차 견디지 못한다. 그것이 리듬의 탓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비극의 탓은 더더욱 아니다. p.12 사랑은 때때로 우리를 구원하지만, 아니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세계의 진실이란 밤처럼 냉정한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사랑이 완전하게 사라진 상태에 가깝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 것은, 대개 이미 늦은 다음이지만. p.29 영혼의 거죽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고요한, 그러나 들끓는 심연이 있다. 그 심연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밤의 호수처럼 아름답고, 때로 밤의 늪처럼 두려울 뿐이다. 심연은 이 세계의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 심연, 호수, 늪을 기록하는 것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정치니 법이니 신문 기사 같은 것들의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실연 때문에 자살했다느니, 실업을 비관해 투신했다느니, 원한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느니 하는 말들을 거의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표면만을 부유하는 그 언어들을 인간에 대한 모독으로 느꼈기 때문에...... 소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