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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세상 끝 등대 3

세상 끝 등대 3 박준 늘어난 옷섶을 만지는 것으로 생각의 끝을 가두어도 좋았다 눈이 바람 위로 내리고 다시 그 눈 위로 옥양목 같은 빛이 기우는 연안의 광경을 보다 보면 인연보다는 우연으로 소란했던 당신과의 하늘을 그려보는 일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 그 모든 우연이 인연의 근거라고 믿었는데 이 시를 읽는 순간 그게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소란한 우연에 들뜬 채 내달린 것일 뿐이었을까 싶어 쓸쓸해졌다. 

박준, 우리들의 천국

우리들의 천국 박준 곁을 떠난 적이 있다 당신은 나와 헤어진 자리에서 곧 사라졌고 나는 너머를 생각했으므로 서로 다른 시간을 헤매고 낯익은 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 시간과 공간 사이, 우리는 서로가 없어도 잔상들을 웃자라게 했으므로 근처 어디쯤에는 그날 흘리고 온 다짐 같은 것도 있었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 우리를 우리라고 할 수 있을지, 천국을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낱말 하나하나가 사무쳐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박준, 세상 끝 등대 1

세상 끝 등대 1 박준 내가 연안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 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더니 너머가 되어버린 것

박준, 저녁 - 금강

저녁 - 금강 박준 소멸하는 약력은 나도 부러웠다 풀 죽은 슬픔이 여는 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따라올라가면 은어가 하루처럼 많던 날들이 나온다 저녁 강의 시야(視野)가 그랬다 출발은 하겠는데 계속 돌아왔다 기다리지 않아도 강변에서는 공중에서 죽은 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땅으로 떨어지지도 않은 새의 영혼들이 해를 등지고 다음 생의 이름을 점쳐보는 저녁 당신의 슬픈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빛이 주저앉은 길 위에는 물도 하릴없이 괴어들고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 온통 새하얗고 드넓은 눈밭 위로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극지의 밤, 이불 속에 웅크려 이 시를 읽으면서 눈빛이 주저앉은 길이 어떤 건지, 조금 알 것 같아서 마음이 먹먹했었다.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박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 좋지 않은 세상을 견디는 힘.

박준, 마음 한 철

마음 한 철 박준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눈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 ( 影 幀 )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어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 그럴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곳에 남아있을 그 이름들, 남몰래 새긴 흔적들. 무심한듯 그렇게 추억이 제법 쌓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