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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를 포기할 각오는 됐나요

편리를 포기할 각오는 됐나요 문이 열리자마자 후끈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더 이상 발 디딜 틈 하나 없어 보이는 안쪽을 향해 기어코 네댓 명이 몸을 욱여넣었다. 옷자락만큼 구겨진 얼굴들이 무언가를 보고는 이내 더 찌푸려진다. 전동휠체어다. 출근길 만원 전철 한 구석에 그게 있었다. 휠체어 위에는 모자를 푹 눌러쓴 노년의 남성이 좀처럼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열차가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자꾸만 그의 머리 위로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를 힐끔거렸다. 환승역에 다다르자 밀치듯 빠져나가는 인파 사이에서 그는 꽤나 불안해보였으며 사람들은 살짝 불편해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편리와 효율이 조금 위협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불의에는 눈을 쉽게 감고, 불편에는 눈에 불을 켠다. 그게 남들보다 수월하게 사는 비결이라고 세상은 가르친다.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것은 그저 적당한 불편이다. 소문난 맛집이라면 삼복더위에도 한 시간 넘게 줄지어 기다릴 줄 안다. 텃밭에서 찬거리를 직접 키우거나, 채식주의자를 자처한다. 2G폰으로 돌아가기도, TV를 없애기도 한다. 김용섭 칼럼니스트는 저서 ‘라이프 트렌드 2017-적당한 불편’에 ‘적당한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트렌드는 소비의 진화이자 소비자의 성숙’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적당한 불편은 대개 나를 위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나의 미각을 위해 줄을 서고, 나의 건강을 위해 기르고 걸러 먹는다. 내 피로를 덜고자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찾는다. 반면 적당하지 않은 불편은 이타적인 속성을 지닌다. 환경을 위해 분리수거를 하거나 텀블러를 쓰고, 필요한 이들을 위해 노약자석을 비워 두는 행동들이 그렇다. 준법 역시 불편 감수에 기초한다. 영국의 신학자 리처드 후커는 “불편함 없이는 변화도 없다.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도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남겼다. 견뎌야 할 불편도 습관이 들면 당연해진다. 내가 더 가져서, 더 잘나서가 아니다. 나만이 아니라 다 같이 행복하기 위해 당연하게 누려 왔던 것들

평범함의 난이도

평범함의 난이도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 누군가 당신을 두고 이런 말을 한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 있겠다. 크게는 두 갈래로 나뉠 것이다. 조금은 섭섭하거나,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거나. 잘난 것도 특별한 것도 없이 흔하다는 것, 곧 당신이 평범하다는 얘기다.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라는 문장은 형용사 ‘평범하다’의 뜻풀이다. 정의가 딱 한 줄일 뿐인 이 간단한 단어를 두고 저마다 각기 다른 모양새로, 평생 사투를 벌인다. 평범함에 대한 모순적인 욕망과 압력 때문이다. “우리 아들은 말이 유독 빨랐어.” “우리 딸은 한번 가본 길을 전부 기억하더라고.” 모든 아기들이 각양의 방식으로 비범하다. 탄생의 순간부터 자라는 내내 무엇인가 특출할수록 좋다. 상당수는 영재가 아닐까 하는 기분 좋은 오해도 받는다. 뭐라도 남다르기를 처음에는 부모가 원하고, 결국에는 자신이 한동안 바란다. 저마다 이것저것 시도하고 부단히 노력한다. 비범함을 동경해서다. 평범함은 겉보기에 누구나 갖고 있는 것 같은 특성이다. 뭇 사람들보다 더 나은 걸 누리리라 다짐하는 이들이 한때 그 소박한 축복을 얕보는 이유다. 그러나 특별해지겠다는 결심은 주류(主流)의 존재를 알게 되는 무렵부터 흔들리기 십상이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여기는 주류의 작동원리와 비범함의 본질이 부딪히기 때문이다. 충돌의 여파로 복잡한 욕망이 생겨난다. 주류에 속하면서도 조금 더 잘되고 싶은, 월등하게 평범하겠다는 의지 같은 것 말이다. 남들만큼은 해야만 할 과업들이 최후 방어선처럼 거기서 하나둘 늘어난다. 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고, 연애를 하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늙어가는 것. 남들처럼, 평범하게. 비범한 사람들은 더욱 고되고 극히 일부만 평범 이상에 간신히 이르더라는 풍문이 두런거리며 맞장구친다. 은근한 폭력이다. 대부분 사람은 세상의 아우성을 못이기는 척 일단 평범해보기로 작정하게 된다. 진짜 전쟁도 그때부터 시작이다. 별

믿는다는 것

믿는다는 것 “사랑하는 XX이에게. … 내년에도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동생과 잘 지내야 한다. 산타 할아버지가.” 산타클로스의 편지를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발견해버렸다. 그것도 아빠 책상서랍에서. 편지 속 글씨는 아무리 봐도 책상 위 메모지에 적힌 아빠 것과 모양이 같았다. 얼얼함이 정수리부터 심장을 관통해 발끝까지 찌르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아빠 책상이나 뒤적거리는 못된 애를 급습한 벌이었나보다. 내 탓이다. 하나님, 예수님과 무슨 사이인지, 천사인지 사람인지, 왜 할머니는 없는지, 산타에 대해 누구도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았는데 내가 그를 믿었다. 그래서 속았다. 기억 속에 각인된 최초의 배신이다. 여덟 살짜리 마음에는 퍽 강렬한 충격이었다. 지금도 그 편지 속 파란 활자들이 눈에 선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믿다’라는 단어의 첫 풀이는 이렇다. ‘어떤 사실이나 말을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다고 여기다.’ 마지막에는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아무 의심 없이 다른 무엇이라고 여기다’라고 적혀 있다. ‘꼭 그렇게 될 것’, ‘아무 의심 없이’라는 표현이 선포하듯 믿음은 순도 100%의 마음이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다만 믿음의 경도는 제각각이다. 작은 외부 충격에 틈을 드러내는 믿음이 있고, 온 세상이 무너지는데 꿈쩍 않는 믿음도 있다. 믿음이 깨질 때는 늘 단단함에 비례하는 통증이 찾아온다. 어른이 되는 것은 곧 조리 있게 의심하는 법을 훈련하는 일이었다. 내게 맞닿은 세상이 넓어질수록 기만과 배신의 경험은 차곡차곡 쌓였다. 그때마다 속절없이 크고 작은 마음의 성장통을 앓았다. 노력하면 된다고 믿었는데 안 되는 일들이 숱했다. 의인은 상을,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믿음이 종종 통하지 않았다. 사람을, 시스템을 쉽게 믿어선 안 됐다. 기자가 된 뒤 허다한 믿음이 엎어지는 광경을 곳곳에서 더 생생하게 목격했다. 보금자리라 믿던 곳에서 가정폭력으로 죽어나간 이들이 있었고, ‘서울중앙지검’을 사칭한 전화에 속아 전 재산을 잃

수(數)의 독재

수(數)의 독재 뇌의 어느 한 구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의심을 한 지 오래다. 두정엽(頭頂葉), 아마 여기 문제인가 보다. 정수리에서 뒤통수로 넘어가는 길목쯤에 있는 뇌의 이 부분이 맡은 역할 중 하나가 수학적 사고력이라고 한다. 나는 수학이 괴롭다. 요즘 말로 ‘수알못’(수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학문 영역까지 갈 필요도 없다. 숫자가 싫다. 수(數)가 싫다. 이 감정은 자주 호오(好惡)의 경계를 넘어 공포로 내달린다. 고작 0부터 9까지 기호 열 개의 조합일 뿐인데, 제멋대로 뒤엉켜 있는 숫자들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하고 번뜩 눈앞이 캄캄한 게 꽤 아찔하다. 피치 못하게 숫자를 접할 때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를 쓰지만 소용은 없는 편이다. 취재 과정에서 다뤄야 할 숫자가 세 자리를 넘어가면 꼭 몇 번은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통계를 바탕으로 기사를 쓸 때는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드리고 엑셀과 씨름한 뒤에도 마음이 편치 않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귀결되는 일이 잦다. ‘숫자에 트라우마가 있다’고 기회 될 때마다 미리 앓는 소리를 해 둔다. 트라우마의 역사는 중학교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출난 재능이 없으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수학과 좀처럼 맞지 않았다.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가 될 뻔했다. 그래도 대학에 가려고 버텼다. 막상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수학 답안지까지 살짝 밀려 썼다. 재수는 안 했다. 수학을 더 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그 뒤로 수와 최대한 멀어지고자 발버둥쳤다. 취업에 중요하다는 경제학이나 경영학은 한 과목도 듣지 않았다. 동생이 수학 문제를 알려달라고 하면 방문을 걸어 잠갔다. 시급이 아무리 높아도 수학과외보다는 콜센터 아르바이트가 편했다. 기자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내심 안도했다. 언론사 입사 시험은 기업 입사 시험처럼 숫자들의 상관관계나 규칙 따위를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점점 더 수 앞에서 무기력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이, 키, 몸무게

초고

낯선 사랑방과 뜻밖의 대화 2014년 가을이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다코야키를 파는 푸드 트럭이 나타났다. 홍등을 주렁주렁 매단 이 작은 트럭 주인은 삼십대 중반이 될까 말까한 청년이었다. 그는 다코야키 4개를 1000원에 팔았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잊을만하면 한 번씩 트럭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저녁 어스름이면 자리를 정리하는가 싶더니 더러는 매일 해가 넘어간 뒤까지 등을 밝히고 손님을 맞았다. 한 달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내가 스무 해를 보낸 이 동네는 신도시도 구도시도 아닌 서울 외곽의 베드타운이다. 붐비지도 않고 적적하지도 않은 상태로 별다른 변화 없이 늘 조용한 편이다. 그래서 푸드 트럭을 몰고 홀연히 나타나 타코야끼를 파는 젊은 남자는 분명 꽤나 낯선 존재였다. 조금은 아련하기도 했다. 한때 자리를 지키던 달고나, 국화빵 같은 노점상들이 유년의 기억과 함께 자취를 감춘 지도 오래였기 때문이리라. 타코야끼 맛이 특별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말했다. “젊은 사람이 열심인거 같아 눈여겨봤는데 장사가 제법 잘 되는 모양이야.”  장사는 지나치게 잘 됐다. 트럭 앞에는 자주 긴 줄이 늘어섰다. 그보다 눈길을 끄는 건 트럭을 둘러싼 훈기였다. “학원가니? 오늘 늦었네!” 잰 손으로 타코야끼를 만들던 청년이 목청껏 이름을 불렀다.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곁을 지나치던 아이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가 이름을 부르는 아이는 한둘이 아니었다. “여덟 개 해주세요. 10분 뒤에 들를게요.” 장 보러 가던 아주머니 ‘예약’에는 잔뜩 신난 청년의 목소리가 뒤따르기도 했다. 줄을 기다리는 손님들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 장면들이 집으로 향하던 내 발걸음을 때때로 멈추게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트럭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동네 사랑방이 돼 있었다.  그해 겨울이 돼서야 나는 비로소 그 알 수 없는 따듯함의 뿌리를 봤다.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 늦은 오후였다. 청년은 둘 뿐인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여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