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이병률


종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한때는 돌을 잘 다루는 이 되고도 싶었는데
이젠 다 집어치우고

아주 넓은 등 하나를 가져
달(月)도 착란도 내려놓고 기대봤으면

아주 넓고 얼얼한 등이 있어
가끔은 사원처럼 뒤돌아봐도 되겠다 싶은데

오래 울 양으로 강물 다 흘려보내고
손도 바람에 씻어 말리고

내 넓은 등짝에 얼굴을 묻고
한 삼백년 등이 다 닳도록 얼굴을 묻고

종이를 잊고
나무도 돌도 잊고
아주 넓은 등에 기대
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으면



=

착란(錯亂). 그건 1025일간의 착란이었다.
내가 너무 어리고, 미숙하고, 손쉽고, 순진해서,
그래서 열병처럼 겪은 착란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왔다.
모든 지난 날의 실체와, 낯설기만 한 그의 정체와,
그 사이에서 애써 위안하며 외면해온 나의 질병이 까발려졌다.
갑작스러웠으나, 차라리 선물이었다.
청춘의 낭비는 이로써 충분했다.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무의미하게 앓지도, 잃지도, 울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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