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불취불귀

불취불귀


허수경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

잔뜩 취한 채 봄의 끝자락을 비틀거리는 것 같은 애달픔이었다. 
완전히 무너진채로 미친듯이 써내려갔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시인 언니와 한잔 기울이고 싶었다.
특히 이 시를 여러번 읽었다. 동사서독을 영화관에서 보던 날의 기억들이 비틀비틀 마음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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