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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가 필요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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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남자들과 입을 맞추고도 왜 내가 혼자 있는지 깨달았다. 내가 이 남자를 가장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가 바빠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네 시간을 기다려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첫키스를 한 지 1000일이 된 거, 그런 것쯤 나한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 말 몇마디면 되는데. 막차가 떠날 때까지 윤석현은 안왔다. 그때는 그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냥 이 닫힌 문이 동굴이고, 그는 어두컴컴한 동굴에 들어가 겨울잠을 자고 있는 한 마리 곰일 뿐임을 안다. 그때의 나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조금 다른 연애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뜨거움이 아니라 애틋함이다. 정답고 따뜻하고 반짝반짝한 느낌. 나에게 필요한건 로맨스였다. 지금 질투하는 거잖아. 왜, 질투하면 안돼? 질투하면 찌질한거야? 난 질투 유치하다고 생각 안해. 질투는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고백이야. 질투라고는 모르는 너 같은 인간이 건강하지 않은거지. 생각해보니까 나는 한번도 너를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도대체 진심이 뭔지 몰라서 지치고 힘든데, 근데도 난 너 좋아해. 미친거지 내가. 그 입맞춤이 좋았다. 첫키스보다 좋았다. 사랑한다는 말보다도 좋았다. 만진다. 잡는다. 간다. 온다. 가르친다. 외출한다. 본다. 느낀다. 슬퍼한다. 화난다. 밉다. 운다. 웃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많이많이 사랑한다. 상처입는다. 상처입힌다. 키스한다. 그리고 잔다. 이 수많은 말들중에 나하고 상관 없는 거 있어? 넌 항상 끝이 아니야. 여기가 끝이다 싶으면 또 다시가. 어. 나는 끝까지 가는 사람이야. 마음이라는 건 육체의 어디에 붙어있을까. 어디에 붙은건지 몰라서 마음이 아플 때는 속수무책 앓고 있는 수밖에.

사랑은 왜 불안한가, 에바 일루즈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자주권을 잃는다는 뜻이다. 낭만주의 시대에 사랑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이 빚어내는 고결한 열정의 직접적 경험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대 들어 자주권 상실은 심각한 문제를 노출한다. 자아가 상대방의 의지 앞에 고개를 숙이는 모양새를 취하는 탓에 사랑이 자아 스스로 자율성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이로써 자아에 흠집이 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는 태도가 빚어진다. 이것이 특히 문제가 되는 까닭은 자율성이야말로 현대인의 핵심적 특징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p.63 상징적이든 물리적이든 폭력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면, 여기서 사랑은 그 폭력이 몸과 마음과 자아에 남긴 것을 일어나지 않은 일로 되돌리고, 철학자 사이먼 메이가 '존재론적 닻 내림'ontological groundedness이라 부른 것을  중개해준다. 이는 곧 적막하기만 한 세상에서 나만의 가정을 찾아냈다는 느낌이다. p.74-75 사랑은 지성의 능력으로는 풀 수 없는 가장 괴이한 모순이라고 헤겔은 썼다. 자신을 부정하면서도 긍정을 이뤄내는 이 극한 모순은 그러나 고맙게도 불합리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비춰진 유일한 구원의 빛이다. 나를 넘어서서 남에게 손을 내밀어 우리를 이뤄내는, 이 부정과 긍정의 '종합, 진테제synthese'야말로 '하나 됨'을 실현하는 사랑의 본모습이기 때문이다. 헤겔이 사랑이라는 모순의 본격적 풀이를 철학이 최고 과제로 삼은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p.116 = 솔직히 말하면 분석 되상이 되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읽지 않아서 원론적인 내용을 서술한 부분들에밖에 공감을 던지지 못하겠다. 똑똑한 사람 참 많다. 이런 분석을 끌어내는 글이라면 로맨스 소설일지라도 한번쯤 읽어볼만 할 듯 싶다.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

D.H. 로렌스의 정의에 따르면 그녀는 다른 사람, 다른 나라, 다른 연인 같은, "다른 것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자였다-그것은 랭보가 청춘 시절 "la vie est ailleurs(인생은 다른 곳에 있다)"라고 했던 말의 메아리와 같다. 하지만 다른 것에 대한 갈망을 병이라 한다면, 이런 병은 어디서 생겼을까? p.9 사랑의 첫 단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지만, 욕망은 사소한 실마리에서도 피어났고, 공백을 메우고자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p.80 경제의 세계에서는 빚이 나쁜 것이지만, 우정과 사랑의 세계는 괴팍하게도 잘 관리한 빚에 의지한다. 재무 정책으로는 우수한 것이 사랑의 정책으로서는 나쁠 수가 있다-사랑이란 일부분은 빚을 지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빚지는 데 따른 불확실성을 견디고, 상대를 믿고 언제 어떻게 빚을 갚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는 일이다. p.140  에릭은 듬뿍 사랑받거나 미움받는데 저항하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앨리스가 관계에 의심을 품을 때를 감지하는 촉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 전에는 그녀의 감정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이것이 의식적인 현상이라면, 그 남자가 며칠간 앨리스를 무시하는데는 극단적인 데가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화내기 직전에 물러서거나 사과하는 식이었다.  앨리스는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 남자의 행동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에릭은 처음 만날 날과 똑같이 복잡해 보였다. p.149 위니캇과 피아제의 이론을 앨리스와 에릭에게 적용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지도 모르지만, 영속성이라는 문제는 공통된다. 여기서는 대상 영속성이 아닌 사랑의 영속성 문제다. 이 사랑의 영속성이란 무엇인가? 상대가 당장 관심의 징표나 신호를 보내지 않아도 사랑이 지속되리라는 믿음, 상대가 밀라노나 빈에서 주말을 보내더라도 다른 정인과 카푸치노를 마시거나 초콜릿 케이크를 먹지 않으리라는 믿음, 침묵은 단순

예언자, 칼릴 지브란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그림자에 가려져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니 이제는 그 사랑이 그대를 큰 소리로 부르며 그대 앞에 드러나 서리라. 참으로 사랑이란 이별의 날이 오기까지는 그 깊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 (p.17-18)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사랑을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르더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싸 안으면 그대들의 온몸을 사랑에게 맡겨라. 그 부드러운 날개털 속에 숨겨진 칼날이 그대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해도, 사랑이 그대들에게 말하면 사랑을 믿으라. 겨울바람이 뜰을 황량하게 만들듯이 사랑의 말이 그대들의 꿈을 산산조각 낸다하여도, 사랑은 그대들을 괴롭히는 만큼 영광스럽게 할 것이요, 사랑은 그대들의 가지를 베어 내는 만큼 그대들을 성장하게 하리니. 사랑은 그대들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근원에 잇닿은 그대들의 뿌리를 흔들어 놓겠지만 사랑은 또한 그대들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햇빛 아래 떨고 있는 그대들의 연약한 가지를 보듬어 안아 주리라. ... 사랑은 자기 자신만을 주고 자기 자신에게서만 받으며 사랑은 소유하거나 소유당하지 않으니 사랑은 사랑만으로 충분하리라 (p.23-26) 아, 심지어 신의 침묵 안에서도 그대들은 함께하리라 그러나 함께 있되 그대들 사이에 거리를 두어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서로를 사랑으로 속박하지는 말라. 그보다는 그대들 영혼의 기슬 사이에 바다가 흐르게 하여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p.29) 삶은 진실로 열정이 없을 때에 어둡고 모든 열정은 깨달음이 없을 때에 맹목적이며 모든 깨달음은 일이 없을 때에 쓸 데가 없고 모든 일들은 사랑이 없을 때에 텅 빈 것이라. 그리고 그대들이 사랑으로 일할 때, 그대들은 스스로를 만나고 또 다른 이들과 연결되고 결국에는 신에게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p.49) "나는 진리를 찾았다."라

사슴 사냥꾼의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 이해경

소영은 운명을 인연으로 바꿔 생각해봤다. 인연을 믿는다? 그냥 오는 거지. 오면 엮일 수밖에 없는 거지. 왔다 간다면? 안 보낼 도리가 있을 텐가. 혹은 보내고 싶어도, 떠나지 않는 그 인연이 지겹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소영은 하고 있었다. (p.100) 우진은 지난봄 한숙의 손을 잡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던 그날 이후로 자신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몸과 망ㅁ과 정신이 한꺼번에 쑤욱 자라버린 느낌이었다. 그것은 착각이었지만, 착각도 변화일 것이었다. 착각이라는 변화 혹은 변화했다는 착각에 힘입어 우진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시인의 마음이었다. 이를테면 첫 키스가 왜 날카로운지,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의 의미라든가, 강을 건너는 님을 바라보는 이의 심정 같은 것을 우진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p.123-124) 시인의 특기는 역설과 반복이었다. 용기는 정직한 자의 것. 겸손이 지혜를 낳지 않더냐. 참고 기다릴지어다. 우진은 시인에게 물었다. 무엇이 정직이고 겸손이란 말인가요. 시인의 대답은 무심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것. 자기 생각을 많이 하지 말 것. 참고 기다릴 것. 우진이 알아들은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우진은 참고 기다렸다. (p.125) 하늘 한번 처다볼 겨를 없이 봄은 갔다. 소영에게 시간은 흐른다기보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그해 1983년 봄, 흩어지는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어디서든 혼자 있을 때, 소영은 그 노래를 나지막이 부르며 어두워가는 분숫가를 떠올렸다. 해 질 무렵 물을 뿜지 않는 분수처럼 쓸쓸한 풍경이 또 있을까. 소영은 눈을 감고 노래 속으로 들어가 말라붙은 분숫가를 서성이며,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p.190) 왜 날 사랑하나. 노래의 반 이상을 채우며 되풀이되는 그 말을 한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날 사랑하나. 한수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말을 하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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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 will be alright in the end, if it's not alright then it's not yet the end. You can have anything you want. You just need to stop waiting for someone to tell you deserve it. The only real failure is the failure to try. and a measure of success is how we cope with disappointments as we always must. Nothing here has worked out quite as I expected. Most things don't. But sometimes what happens instead is the good stuff. There is no past that we can bring back by longing for it. Only a present that builds and creates itself as the past withdraws. Initially you're overwhelmed. But gradually you realze it's like a wave. Resist, and you 'll be knocked over. Dive into it, and you'll swim out the other side.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그 어느 곳인들 아니리오.

고래, 천명관

춘희는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비극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육체는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천형의 유니폼처럼 단지 고통의 뿌리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 거대한 육체 안에 갇힌 그녀의 영혼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여줬던 불평등과 무관심, 적대감과 혐오를 그녀는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었을까? ...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만이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한 줄 또는 두 줄로 세상을 정의하고자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명제가 그런 것이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p.393) 그간 춘희의 수형생활은 침묵과 망각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녀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을 피해 구석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동안 새순처럼 여리고 무구한 춘희의 감성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춘희는 자신의 상처를 어떤 뒤틀린 증오나 교묘한 복수심으로 바꿔내는 술책을 알지 못했다.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치되지 않았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고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엔 고통이 화석처럼 굳게 자리를 잡았다. 그것이 춘희의 방식이었다. (p.445) 왜냐하면 그녀의 노동이 단지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너무 필사적이었으며 단지 유희라고 하기엔 너무나 고된 일이었으며, 또 단지 그리움 때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반복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안의 계곡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독자 여러분, 이야기는 계속된다. (p.516-517) = 이야기는 계속된다. 전에 겪어 보지 못한 방식으로 서사는

김남조, 편지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 서둘러 퇴근을 하고 그를 만나러 가는 길. 문득 경찰서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눈부셔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을지로입구역이었던가. 무심코 멈춰서 눈앞의 시를 훑다가 눈물이 났다. 솔직한 낱말들, 꾸밈없지만 마음보다도 정확한 문장들. 정말이지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생각만으로도 글썽글썽한 누군가가 있다. 그건 때때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픈 일이지만, 참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Le week-end (2013), 위크엔드 인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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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의 딥키스가, 남편과의 달콤한 전화통화가 의아한 일로 여겨지고 그 시선이 농담처럼 소비되는 현실이 슬프다.  이 부부처럼 유쾌하고 신명나게 쉼 없이, 지침도 없이 사랑하며 늙어가고 싶다.  섹스보다 사랑이 어렵다는 고민을 그토록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털어놓다니. 런닝타임 내내 배나온 이 영국인 아저씨는 줄곧 귀엽다.  같이 늙어간다는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일이다. 아름다운 일들이 흔치 않은 현상이 돼 가는 시대에, 나는 여전히 그걸 꿈꾼다. @아트하우스 모모 2014. 05.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