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Aimer-vous Brahms...
(민음사)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는 포도주를 한 모금 길게 마셨다. 폴을 반박하지 않았다.
p.43-44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짧은 그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 뿐인지도 몰랐다.
p.56-57

그에게 인생이라는 걸 가르치는 데는 시간이 자신보다 더 유능하겠지만, 그러려면 훨씬 오래 걸리리라. 그녀의 손 안에 놓인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에서 맥박이 파닥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 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아니면 조금은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키스했다.
...
그들 사이에는 수많은 낮과 밤이 펼쳐져 있고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 그런 생각과 동시에 그는 그녀에 대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한 욕망을 느꼈다.
p.83

그녀는 자신의 숙명, 이 모든것이 피하려고 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은 그 느낌, 그녀의 삶에는 피할 수 없는 누군가가 있고 그것이 곳 로제라는 생각에 저항했다.
p.137

그녀는 좀 더 울고 싶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길을 잃은 기분도.
p.149

그녀는 한 번 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슬픔을 받쳐 주었다. 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 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그가 부러웠다.
p.150



=

내게는 어떤 형이 내려질까?
왜 인간은 즐기지도 못할 고독을 떠안길 자처하며 괴로워하는 것일까.
삶의 관성이란 게, 마음의 관성이란 게 이토록 난공불락이다.
로제라는 인간의 뻔뻔함에 구역질이 치밀어 답답하고 멍청한 폴에게는 화가 났다.
그러다가 어쩌면 나는 폴보다도 시몽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더 가슴이 아팠다.

폴은 로제가 변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마음을 저당잡힌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여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차라리 사형보다도 괴로운 고독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한 마음을 안고 일을 하는데 옆 테이블 아줌마들의 수다를 그대로 흘려보낼수가 없다. 정리해보자면 뭐 이렇다.

남자의 정은 한곳이지만 주변 여자들이 가만 두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능력이 있으니 그것도 가능한 거지
멀쩡한 남자를 가만 두겠냐
바람이야 필 수도 있다
남자들이란 본디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
한두번이야 넘어가면 되지

뭐 이런 종류의 얘기를 하하호호 깔깔거리며 나누는 이 아줌마들은 뭘까.
이 아줌마들이 어리석은걸까, 아님 연륜에서 우러난 지혜를 등한시하는 내가 어리석은 걸까. 이 아줌마들은 차라리 어리석은 편을 택하는 게 맘이 편한 걸까.
뿌리부터 잘못된 우리나라의 성 역할과 성 관념을 탓해야 하나.
정말 남자들은 그저 그런 족속들인가 -_-
책임감있고 성실한 소수의, 혹은 다수의 남자들에 대한 모독은 아닐까.

요즘 들어
차차리 평생 혼자인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 내게 브람스를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달라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해피투게더 (1997)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인턴 (2015)

2015년 11월 4일 수요일 10개 일간지 1면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