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The Course of Love)

알랭 드 보통/김한영 옮김/은행나무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p.16

러브스토리는 누군가 우리를 다시는 보지 않으려 할까 봐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항상 보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그들이 도망갈 수 있는 기회가 도처에 널려 있을 때가 아니라 평생 서로의 포로가 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나눌 때이다.
...
우리는 러브스토리들에 너무 이른 결말을 허용해왔다.
p.27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마치 뜻 모를 밤의 언어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것 같다.
p.44

쾌청한 밤에 온 우주가 그들을 맞으러 내려왔다. 그녀는 안드로메다자리를 가리킨다. 비행기 한 대가 에든버러 성 위를 넘어 착륙을 위해 공항으로 직행한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이 사람이 함께 늙어가고 싶은 여자란 느낌이 확실해진다.
p.59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p.116

두 사람 모두 친밀해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마음이 아플 수 있지만 그로 인한 어떤 결과로부터도 안전하다. 그들은 결코 분개할 필요가 없으며, 계속해서 서로를 좋은 마음으로 생각할 것이다. 미래가 없는 사람들만이 그럴 수 있듯이.
p.209

결혼: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p.237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이다.
...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이 미쳤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p.280-281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알맞은' 사람의 진정한 표지는 완벽한 상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조화성은 사랑의 성과물이지 전제 조건이 아니다.
p.283-284

그는 이제 거의 어떤 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처럼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
그리고 이 늦은 오후 여름 햇살 아래 스코틀랜드의 산비탈에서 경험한 짧은 순간-그리고 그 이후에도 때때로-라비 칸은 커스틴이 곁에 있으면 인생이 무엇을 요구하든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겠다고 느낀다.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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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결혼을 해보지 않은 탓에 라비와 커스틴이 거치는 일련의 우여곡절이 너무나도 거대하게 다가왔다. 연애가 길어지면서 흔하게 겪는 증상들인 것도 같지만, 제도적인 결속으로 맺어진 남녀가 고민하는 헤어짐의 깊이는 차원이 다른 것이리라.
너무나도 진솔한 결혼생활의 민낯을 본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하다. 처음 본 것도 아니고, 막연히 추측하고, 예상하던 그 맨얼굴을 조목조목 뜯어서 낱낱이 파헤치는 탓에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번역가가 이번에 처음 바뀌었는지.. 늘 번역이 탁월하다고 생각했던 정영목 선생님 대신에 다른 분이 맡았는데 자꾸만 데스킹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더 좋은 표현으로 살릴 수 있을 법한 문장들과 비문들이 보여서 살짝 괴로웠다.

이 책을 꽤 긴 편인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시작했는데 그 제목이 마치 연휴와 나의 관계 같았다. 짧고도 낭만적인 날들이 가고 이제 열 시간 뒤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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