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6인/문학동네


1. <고두(叩頭)>, 임현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단다.
p.10

*작가노트-두고두고 애매한 것들과
더불어, 선명하게 나쁜 것을 색출해내는 일만큼 복잡하게 나쁜 것을 감각해야 할 또다른 이유 중 하나는 분명하게 슬픈 사람들 사이에 민감하게 아픈 사람들도 있다는 점. 모호하게 다친 사람에게는 다른 종류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점.
p.40


3. <문상>, 김금희


송 역시 그 일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마음이 난폭해지곤 했다. 그것은 실체가 있는 대상이 아니라 실체는 없지만 힘은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향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바람, 막 출발한 동대구행 KTX가 달리면서 일으키는 이 광포한 바람, 흩날리는, 승강장 사람들의 머리카락과 현수막, 그리고 바람이 멈춘 뒤 찾아오는 정적 사이에서 느껴지는, 살아 있다는 것. 진행되지만 실감할 수 없는 그것을 모멸하고 난폭하게 굴고 싶은 마음.
p.95

송은 희극배우가 확실히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 나쁘냐면 지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옛일을 완전히 매듭짓고 끝내고 다음의 날들로 옮겨온 흔적이 없었다. 그의 날들은 그냥 과거와 과거가 이어져서 과거의 나쁨이 오늘의 나쁨으로 이어지고 그 나쁨이 계속되고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차피 나빠질 운명인 것이다. 선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선택되는 것이다.
p.107

*작가노트-더이상 나쁘지 않은 날들
소설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나쁨'에 대한 지겨운 고백을 듣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울어야 할 일과 절대 울고 싶지 않은 일, 되돌려주고 싶은 모욕과 부끄러움, 한순간 광포한 것으로 변해버리는 환멸과 후회들이 차창 밖처럼 연속된다. 나는 누구나 아주 나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고 믿고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한계도 있을 것이다.
p.119


4. <고요한 사건>, 백수린


창밖에는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눈송이가. 역청빛 어둠을 덧칠한 이웃집의 지붕 위에도, 옥상 위의 장독대와 비탈 아래쪽의 앙상한 나무초리 위에도, 고요하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것은 정말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눈송이였다. 마른눈. 자국눈. 가랑이눈. 국어사전에서 내가 발견했던 무수한 단어로도 형용하기가 충분치 않던 눈송이. 그토록 숨막히는 광경을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그렇게 한동안 서 있었다. 구겨진 신발 위에, 양말도 없이, 까치발을 한 채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p.155


6. <그 여름>, 최은영


수이와 헤어진다면 그 상황을 가장 완전하게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수이일 것이었다. 그 가정은 모순적이지만 가장 진실에 가까웠다.
p.253

수이는 시간과 무관한 곳에, 이경의 마음 가장 낮은 지대에 꼿꼿이 서서 이경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수이야, 불러도 듣지 못한 채로, 이경이 부순 세계의 파편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곳까지 이경은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은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수이와 헤어지지 않았을까. 그 가정에 대해 이경은 자신이 없었다.
p.266

이경은 입을 벌려 작은 목소리로 수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강물은 소리없이 천천히 흘러갔다.
날갯죽지가 길쭉한 회색 새 한 마리가 강물에 바짝 붙어 날아가고 있었다. 이경은 그 새의 이름을 알았다.
p.267

*작가노트-그곳에서 만날 수 있을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세상,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상. 나는 글을 쓸 때 그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내가 글을 쓰기도 전,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현실로부터 피신하곤 하던 곳이었다. 내성적인 사람들의 희미한 목소리로 지어진 아름다운 집. 나는 그 집에서 편안함과 소속감을 느꼈다. 그곳은 내가 마음을 둘 곳이었다.
두려운 어른들과 함께 있어야 할 때, 당황스럽고 난처할 때,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질 때 책을 펴고 문장들을 따라 읽으면 마음의 고통이 누그러졌고, 길게만 느껴지던 시간을 금방 흘려보낼 수도 있었다. 현실에서 내내 겉돌기만 할 때도 언제고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그곳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흘러드는 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p.269


7.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천희란


인간은 누구나 아주 모르지 않으면서 겨우 조금 아는 것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것을 새삼 떠올렸을 뿐입니다.
p.281

생존하려는 것은 스스로 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바꾸기도 한다는 오래전 할아버지의 말씀을 겨우 붙들고 있는 밤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기만을, 간절한 마음으로.
p.299

네가 모든 걸 잘해낼 수 있을 거리고는 말할 수 없구나. 너와 나는 닮은 점이 별로 없지만, 적어도 진화와 생장이 극복이나 성장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버지께 배운 사람들이잖니. 그러니 그저 그 두려움이 지나가고 난 뒤에, 네가 그것을 모두 지나온 지점에 서 있으리라는 말을 해주고 싶구나. 그리고 은유란 선명하고 매혹적이지만, 때로는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미혹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이를테면 네가 망쳐온 그 화분들은 결코 네가 얻게 될 생명과는 등가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p.303




=

찬란한 이야기들만을 그러모아 만든 풍성한 꽃다발 그걸 매년 받아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지극한 행복인가. 올해도 벅차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한동안 문학을 읽지 않았어서인지, 이번 작품집에 유독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들이 가득했다. 단편 소설에 실컷 매혹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짧막한 이야기들에서 더 깊은 무엇인가를 느낄 줄 알게 된 것 같다.

각각의 작품이 저마다 아름다웠지만 가장 절절했던 건 최은영의 그 여름이다. 평론가가 덧붙인 그대로, 이 이야기를 한줄로 요약하자면 레즈비언 소녀의 첫사랑 이야기. 그러나 이 한 줄짜리 문장이 차마 전하지 못하는 아련하고 알싸한 무엇인가가 가득한 소설이었다. 강물 위로 부서지는 한여름의 노을과 함께 마음 속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같은 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없는 사람처럼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 수이와 그녀의 아마도 고달플 삶이 가슴아팠다. 이 이야기를 수이의 목소리로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래서였다.

백수린의 고요한 사건도 좋았다. 한국문학의 클리셰와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을 접목시킨 점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왠지 모를 마지막 장면의 충격은 함께 실린 평론에서 명쾌하게 설명됐다. 여기에 대해 신샛별은 "회고의 형식을 취하면서 이 소설은 이 질문을 영리하게 피해가고 있지만, 우리는 이 질문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이 교착(交錯)하는 순간을 짚으면서 백수린은 미적인 것에 대한 판단이 윤리적/도덕적인 것에 대한 판단을 압도하거나 삭제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인식에까지 나아갔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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