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오은, 청춘

청춘 오은 거센소리로 머물다가 된소리로 떠나는 일 칼이 꽃이 되는 일 피가 뼈가 되는 일 어떤 날에는 내 손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 손은 내가 아니니까 내 마음이 아니니까 자유는 늘 부자연스러웠다 몸의 부기를 빼는 일 마음을 더는 일 다시 예사소리로 돌아가는 일 꿈에서 나와 길 위에 섰다 아직, 꿈길 같았다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 시인선 488 문학과지성사 = 모난 것들이 아름다워지고, 흐르는 것들은 단단해지는 시간이 되기를

이제니, 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

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 이제니 꿈을 꾸고 있었다 구두를 잃어버린 사람이 울고 있었다 북해의 지명을 수첩에 적언허었다 일광의 끝을 따라 죽은 사람처럼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밤 전무한 추락처럼 검은 새는 날아올랐다 언덕에 앉아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휘파람을 불려고 애쓰는 사이 그 사이 흉터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너의 손목에 그어진 열십자의 상처였다 한번 울고 한번 절할 때 너의 이마는 어두워졌다 쓸모없는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바닥에 앉아 꽃을 파는 중국인 자매를 보았다 모로코나 알제리 사람인지도 모르지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비밀을 지킬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가 누군가를 비난할 때 그것이 너 자신의 심장을 겨눌 때 거리의 싸구려 과육과 관용을 함부로 사들일 때 나는 그것이 네가 병드는 방식인 줄을 몰랐다 말수가 줄어들듯이 너는 사라졌다 네가 사라지자 나도 사라졌다 작별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발설하지 않은 문장으로 너와 내가 오래오래 묶여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잊혀진 줄도 모른 채로 잊혀지지 않기 위함이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세요 할 수 있는 것은 하겠습니다 창문을 좀 열어도 되겠습니까 문이 잠겨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밤 우리는 둥글고 검은 것처럼 사라졌다 문장 사이의 간격이 느슨해지듯 우리는 사라졌다 누구도 우리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321 창비 = 기울어 사라지는 모든 것. 쓸모없고 아름다워 영원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의 안녕을 빌면서 문장을 곱씹었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쇼코의 미소 최은영/문학동네 <쇼코의 미소>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p.24-25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 p.34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사내답지 않다고 여기며 깔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런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어져나왔던 사랑의 흔적들이 있었다. p.47 <신짜오, 신짜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p.90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p.115 <한지와 영주> 언니의 목소리에 실린 분노에 가까운 두려움은 나의 오래된 주인이었으니까. 그 두려움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나를 추동했고 겉보기에는 그다지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 어른으로 키워냈다. 두려움은 내게 생긴 대로 살아서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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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2016) SoulMate, 七月與安生 드라마  중국 2017.12.07 개봉 110분, 15세이상관람가 (감독)  증국상 (주연)  주동우 ,  마사순 ,  이정빈 헤어짐이 슬픈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실망한 것이었다.  안생을 자신만큼 사랑할 수 없어 실망했고,  인생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없음에 낙담했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 어른이 된다는 건 원래 이런 것이란 걸.  칠월은 안생에게서 이별을 배우고 그리움과 기다림도 배웠다.  세상에 뛰어들 열정이 너와 함께 사라졌나봐. 네가 멀리 갈수록 난 어디에도 가기 싫어. 조금 굴곡진 삶을 산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건 아냐. 좀 많이 힘들 뿐이지.  어차피 여자는 어떤 선택을 해도 힘들어. 내딸만은 예외이길 바라는 거지. 안생아 넌 내 최고의 친구야. 난 널 미워했지만, 그래도 나한텐 너뿐이었어. 이별이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단지 어른이 되었으니 작별인사에 익숙해져야겠지. 떠돌던 칠월은 알았다.  언젠가 뒤돌아봤을 때 자기 그림자를 밟고 있는 이는 분명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안생일 거라는 걸. = 맞닿았다가 포개어졌다가 엇갈리다가, 마침내 서로가 되어버린 두 소녀의 그림자. 영혼을 낱낱이 나누진 못하더라도, 너의 이름으로 너의 삶을 써내려가며 너의 그림자 위를 살아가는 뜨거운 우정. 서로에 대한 동경은 조금 슬픈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악역은 남자주인공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