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쇼코의 미소

최은영/문학동네



<쇼코의 미소>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p.24-25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
p.34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사내답지 않다고 여기며 깔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런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어져나왔던 사랑의 흔적들이 있었다.
p.47


<신짜오, 신짜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p.90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p.115


<한지와 영주>

언니의 목소리에 실린 분노에 가까운 두려움은 나의 오래된 주인이었으니까. 그 두려움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나를 추동했고 겉보기에는 그다지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 어른으로 키워냈다. 두려움은 내게 생긴 대로 살아서는 안 되며 보다 나은 인간으로 변모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었다. 달라지지 않는다면, 더 나아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소거되어버릴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에 머물기를 택했다.
p.129

나는 한지를 알지 못했다. 그애의 세계를, 그애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조금은 더 따뜻해지고 밝아지는 세계를 알지 못했다.
p.155

슬플 때, 불안할 때, 화가 날 때, 누군가가 내 마음을 쥐고 흔들 때, 나는 그 이름들을 그저 간절하게 불렀고,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현실의 고통에서 나를 분리시켜줬다. '원시지구'로 시작해서 '여러 종류의 발굽이 있는 동물'까지 중엉거리고 나면,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준 것 같았다. 그럴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한지는 그걸 알았을까. 내가 그의 옆에서 사라진 생물들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왔다는 것을. 그것으로 한지에 대한 내 감정을 억누르려 했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그애가 내 생각을 읽게 될까봐 두려웠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한지가 내 마음을 알게 된다면 멀리 도망가리라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p.159

노트는 별다른 저항 없이, 미끄러지듯 얼음 속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적어도 일만 년간 썩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시간 동안 거듭해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그 기억들이 나를 떠나 이 얼음에 붙기를.
...
끝까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 단순함.
그 위로 흐르는 시간.
단절.
그 모든 것들, 얼음 속으로 떨어진다.
여기에 머물렀다 떠나간 많은 생명들처럼.
p.180-181


<미카엘라>

깨끗한 샘물 같은 그에게 더러운 욕탕이 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세상에 소용없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세상의 그 많은 소용 있는 사람들이 행한 일들 모두가 진실로 세상에 소용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p.228


=

이야기 하나하나가 마음에 일렁였다.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실과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책장을 덮고 났을때에는 갖지 않았던 무엇인가를, 알지 못했던 누군가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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