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19의 게시물 표시

보통의 존재, 이석원

보통의 존재 이석원 / 달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마침내 모든 인연은 소멸하였다. 함께 보낸 시간들은 묻혀 화석이 되거나 기억과 함께 사라져갈 형편이 되었다. P.15 나는 내가 본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것. 오직 너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것. P.23 아무도 없는 세상에 나 홀로 있다가 아무도 없는 세상에 둘이서만 있게 되는 게 연애입니다. 그래서 연애를 해도 외롭지 않게 되는 건 아니지요. 아무도 없는 세상에 기껏해야 한 사람이 더 생기는 것에 불과하니까. 찬욱이 형은 이 영화에 내가 알지도 못할 무수한 것들을 담으셨겠지만 내게는 이 부분이 유독 가슴에 남을 것 같습니다. 비록 제가 뱀파이어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그런 깜깜 낭떠러지에 둘이서만 서본 경험이 있거든요. P.72 현실은 고통스럽고 꿈속의 사막은 달콤하다. 그렇기에 나는 사막을 꿈꾸는 노래를 짓고 부른다. 고통이 아니었던들 내게 평화로운 삶 같은 것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생의 중요한 것들이 이처럼 고통 속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이 내겐 아직도 낯설게 느껴진다. P.93 생각해보면 살아가면서 내가 정말 사랑해야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뿐입니다. ... 인생이라는 게임이 왜 이렇게 모순되고 불공평한지 38년을 살아왔지만 아직 잘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건 인생이란 사랑할 대상을 골라서 사랑하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것 뿐. 그러나 그 불공평함이 결국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면, 게임의 승부는 누가 하루라도 더 빨리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 그러나 해답을 알 수 없는 오랜 물음을 던진 끝에 어느 날, 내가 그토록 달아나고 싶고 회의하던 것들로부터 나와 내 삶이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인 순간, 나의 모든 아쉬움들은 그제야 비로소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바로 잘나지 않은 내

이제니, 남겨진 것 이후에

남겨진 것 이후에 이제니 흰 집 건너 흰 집이 있어 살아가는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지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뜨리는 유년의 얼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서 서성이는 눈빛으로 인간 저 너머의 음역으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듯이, 한밤의 고양이와 친해진 것은 어느 결에 사람을 저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사람이라는 말. 그저 사랑이라는 말.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울어라.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네 자신으로 존재하여라. 두드리면 비춰 볼 수 있는 물처럼. 물은 단단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남겨진 것 이후를 비추고 있었다.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520 = 어떤 기억에 대해서, 나 대신 쓴 것만 같은 시. 단단한 얼굴에 비추어진 이후는 어떠한가.

신철규, 눈물의 중력

눈물의 중력 신철규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고 밤은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 밖에 없다 눈을 감으면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닌다 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 그의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 못 박힐 손과 발을 몸안으로 말아넣고 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 밤은, 달이 뿔이 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시인선 096 =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는 슬픔.  손으로 눈물을 받으며 엎드려 우는 누군가의 모습을, 생전엔 만난 적 없던 어린 영혼들의 빈소에서 밤마다 매일 보아야 했던 때가 있었다.  신은 어쩌면 그 등마다 걸터앉아 있거나 땅으로 스미는 눈물을 함께 받치고 있었을텐데, 그들은 도대체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단단히 울었을 것이었다.  자려고 누워도 귀에서 울음소리가 떠나지 않던 날들이었다.

한강, 서시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리라는 확신. 이 시집의 평론에는 막스 파카르트의 말이 적혀 있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심연을 잠재우고, 심연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마쓰이에 마사시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마쓰이에 마사시/ 권영주/ 비채 우리는 오래 사귄 사이였다. 일단 그렇게 되고 나면 망설이지도, 살피지도 않는다. 우리 둘에게 남아 있던 기억이 잇따라 흘러넘쳤다. 우리에게는 신호도, 확인도, 승낙도 필요 없었다. 그로부터 이어진 나날에 나는 잘 마른 장작처럼 화르르 타올라 연기를 뿜었다. 온몸 구석구석이 행복했다.  P.196-197 얼마 동안, 심지어 한 달 동안이라도 깊이 맺어져 있었다면 기억은 언제까지고 남는다. 말이 아니라 마음과 피부의 기억으로. P.198 = 선물 받은 책인데, 제목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쓸쓸한 이야기인데 집과 고양이에 대한 묘사 때문에 온기가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김희선/ 백수린/ 이주란/ 정영수/ 김봉곤/ 이미상 문학동네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도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P.24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P.82 망각조차도 내게는 일종의 부자유스러운 상황으로 진입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동안 나는 도대체 ㅜ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꿈꾸었던 것일까. ... 그가 나의 가장 뜨거운 조각들을 가져가버렸다는 사실을, 그로 말미암아 내 어떤 부분이 통째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을 후에야,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P.84 -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그날 언니와 나눈 대화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사실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그러니까,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P.156 - 백수린, <시간의 궤적> 나는 회의로 가득차 있었고, 어디에서든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라도 발견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희망이란 때때로 멀쩡하던 사람까지 절망에 빠뜨리곤 하지 않나? 아니 오로지 희망만이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게다가 희망은 사람을 좀 질리게 하는 면이 있는데, 우리들은 대체로 그런 탐스러워 보이는 어떤 것들 때문에 자주 진이 빠지고 영혼의 바닥을 보게 되고 회한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P.237 “우리 매년 여름마다 여기 올까?” 우리가 단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 없는 다음 여름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현수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