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존재, 이석원
보통의 존재
이석원 / 달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마침내 모든 인연은 소멸하였다.
함께 보낸 시간들은 묻혀 화석이 되거나
기억과 함께 사라져갈 형편이 되었다.
P.15
나는 내가 본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것. 오직 너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것.
P.23
아무도 없는 세상에 나 홀로 있다가 아무도 없는 세상에 둘이서만 있게 되는 게 연애입니다. 그래서 연애를 해도 외롭지 않게 되는 건 아니지요. 아무도 없는 세상에 기껏해야 한 사람이 더 생기는 것에 불과하니까.
찬욱이 형은 이 영화에 내가 알지도 못할 무수한 것들을 담으셨겠지만 내게는 이 부분이 유독 가슴에 남을 것 같습니다.
비록 제가 뱀파이어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그런 깜깜 낭떠러지에 둘이서만 서본 경험이 있거든요.
P.72
현실은 고통스럽고 꿈속의 사막은 달콤하다. 그렇기에 나는 사막을 꿈꾸는 노래를 짓고 부른다. 고통이 아니었던들 내게 평화로운 삶 같은 것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생의 중요한 것들이 이처럼 고통 속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이 내겐 아직도 낯설게 느껴진다.
P.93
생각해보면 살아가면서 내가 정말 사랑해야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뿐입니다.
...
인생이라는 게임이 왜 이렇게 모순되고 불공평한지 38년을 살아왔지만 아직 잘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건 인생이란 사랑할 대상을 골라서 사랑하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것 뿐.
그러나 그 불공평함이 결국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면, 게임의 승부는 누가 하루라도 더 빨리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
그러나 해답을 알 수 없는 오랜 물음을 던진 끝에 어느 날, 내가 그토록 달아나고 싶고 회의하던 것들로부터 나와 내 삶이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인 순간, 나의 모든 아쉬움들은 그제야 비로소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바로 잘나지 않은 내 가족과 친구들, 무엇보다 늘 부끄럽게 여기던 내 자신까지, 바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이 내게 건넨 힘과 그들과 함께했던 세월 덕택이었습니다. 비록 조금 뒤늦긴 했지만, 이제 내겐 이 화려한 유산을 마음껏 쓰는 일만 남았습니다.
P.99
순간을 즐기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사랑한다.
우리는 반드시 헤어질 테지만 내 일생의 연인은 바로 네가 될 거야.
P.106
언젠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미친 듯이 사랑이 피어오르는 순간을 사진 찍듯 잡아채 음악의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다 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지금의 나는 또다시 거짓말처럼 광활한 꽃길 앞에 서 있다. 영원히 지지 않는 해를 벗 삼아 일천 킬로미터짜리 꽃길을 둘이서 걸어가는 황홀한 순간,
나는 절망한다.
이 기나긴 길도 언젠간 끝날 것을 알기에.
P.163
활짝 핀 꽃 잎에
남은 운명이
시드는 것밖엔 없다 한들
그렇다고
피어나길 주저하겠는가.
P.188
연애는 학습이다 할 때마다 늘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니까. 문제는 배운 것을 써먹게 되는 건 언제나 지금 ‘이 사람’이 아닌 미래의 ‘다음 사람’이라는 것이다. 연애는 그래서 이어달리기다. 이어달리기의 규칙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사람에게 받은 것을 그 사람에게 다시 돌려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통은 언제나 상관 없는 다음 사람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니까).
여기 출발선에 서 있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지난 경주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한다. “이봐. 예전에 받았던 바통 같은 건 던져버려. 첫번째 주자가 되어보라구.”
과연 그는 출발할 수 있을까.
P.362
=
너무 좋을 것 같아서 오래 전부터 마음에 아껴두곤 읽지 않았다.
마침내 읽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참 좋았다. 노래가 그랬듯이 글도.
쿨한척, 어른인척 스스로에게 연약한 갑옷을 입히느라 애쓰다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이석원의 문장들이 담담하면서도 과감하리만치 솔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스스로의 연약함을 털어놓다니!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들 이정도는 찌질하고 겁 많고 외롭고 아프구나, 내가 혼자는 아니구나 싶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얼굴에 대해 쓴 글이 있다. 지금의 내 얼굴이 전생에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라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던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이석원은 ‘이 얼굴을 사랑했다니 믿을 수 없다’는 투로 글을 써놨다. 크게 공감하면서 한편으론 이 얼굴의 주인인 영혼은 어디서 어떤 얼굴로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또한 내 영혼의 본디 얼굴은 어디에서 누구로 살고 있을지도 궁금해졌다. 혹시 전생에 서로를 가장 사랑했다면, 그는 나의 얼굴을, 나는 그의 얼굴을 갖고 지금을 살고 있는 걸까. 그런 두 사람이 다시 만나면 다시 서로를 가장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쓸데없이 낭만적인 생각들이 똬리를 자꾸만 틀었다.
나는 전생을 믿지 않는데도 말이다.
믿는 것에 대해서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여운을 남기는 책이었다.
술술 읽히는데 책장은 무거운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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