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애니멀,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

조너선 갓셜 / 노승영 옮김 / 민음사


우리가 셰익스피어 연극을 관람하며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케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우리의 정신을 확장하거나, 인간 조건을 탐구하거나, 숭고한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뿅 가기 위해서이다.
p.51

따라서 이 논리를 따르자면 우리가 이야기를 추구하는 것은 이야기를 즐기기 때문이지만, 이야기를 즐기도록 자연이 우리를 설계한 이유는 연습의 유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픽션은 인간의 문제를 시뮬레이션 하는 데 특화된 아주 오래된 가상 현실 기술이라는 것이다.
p.85

꿈의 학문적 정의는 "서사 구조가 있는 감각 운동의 환각"이다. 꿈은 사실상 밤의 이야기이다.
p.99

제임스 틸리 매슈스의 터무니없는 환상에서 보듯 병든 마음은 감각을 복잡하게 짜 맞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
우리의 마음 또한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자료로부터 의미를 추출해 내려고 끊임없이 애쓴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편집성 정신 분열병 환자의 이야기처럼 극적으로 일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곧잘 일탈한다. 이것은 이야기하는 마음을 얻은 대가이다.
p.126

이야기하는 마음은 중대한 진화적 적응이다. 그 덕에 우리는 사럼을 일관되고 질서 정연하고 의미있게 경험한다. 삶이 지독하고 소란스러운 혼란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마음은 완벽하지 않다.
...
이야기하는 마음은 의미 중독자이다. 이야기하는 마음은 세상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내지 못하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려 든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는 마음은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때는 진짜 이야기를, 그럴 수 없을 때는 가짜 이야기를 제조하는 공장이다.
p.133

달리 말하자면, 미래처럼 과거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 다 마음속에서 창조한 환상이다. 미래는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머릿속에서 돌리는 확률 시뮬레이션이며, 과거는 미래와 달리 실제로 일어났지만 우리 마음속에서는 마음 시뮬레이션으로 표현된다. 기억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다.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며 크고 작은 세부 사항 중에서 상당수가 의심스럽다. 기억은 완전한 허구는 아니지만 원본이 아니라 각색에 불과하다.
...
심리학자 제롬 브루나 말마따나 기억은 "진실 말고도 여러 주인을 섬긴다."
...
달리 마러하자면 우리가 과거를 잘 못 기억하는 이유는 삶 이야기에서 주인공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p.206-207

이 모든 연구에서 보듯 우리는 이야기하는 마음의 위대한 걸작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매우 일관된 실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날조를 억제하지 못하며 우리의 꿈과 희망 때문에 끊임없이 왜곡된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삶 이야기를 살아간다. 집필 중인 소설처럼 우리의 삶 이야기는 신뢰할 수 없는 소설가의 손에 의해 늘 바뀌고 발전하고 편집되고 개작되고 윤문된다. 우리는 많은 부분 우리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이다.
p.213

우리는 소설이 생기기 전에도 이야기의 동물이었으며, 주의 집중 시간이 짧아지거나 기술이 발전해서 소설이 퇴물이 되더라도 여전히 이야기의 동물일 것이다. 이야기는 진화한다. 생명체처럼 환경의 요구에 끊임없이 자신을 적응시킨다.
p.220

소설가이자 비평가 톰 비셀은 <여분의 생명>에서 우리가 새로운 형태의 스토리텔링이 탄생하는 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한다. 이 스토리텔링의 문법은 아직도 발견되고 정제되는 중이다.
p.222

지금은 이야기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시대이다. 출판, 영화, 텔레비전이 고통스러운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스토리텔링으 ㅣ기술은 구술에서 점토판으로, 육필 원고로, 인쇄 서적으로, 영화로, 텔레비전, 킨들, 아이폰으로 진화했다. 그때마다 비즈니스 모델은 만신창이가 되지만,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일은 없다. 픽션의 공식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늘 아래와 같을 것이다.
인물+어려움+탈출 시도
미래를 예측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바보짓이지만, 이야기가 인간의 삶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우려는 단연코 기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미래에는 우리를 픽션으로 이끄는 요소들이 심화될, 아니 완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p.227

비슷한 맥락에서 디지털 기술이 진화하면 어디에나 있으며 몰입적이고 쌍방향적인 이야기의 매력이 위험 수준에 이를지도 모른다. 정말 두려운 것은 이야기가 미래에 인간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완전히 집어삼키는 것이다.
...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의 힘을 활용하되(<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생각해 보라.) 필요에 따라서는 그에 저항하라.(<국가의 탄생>을 떠올려 보라.)
p.238-239

사람들이 이야기 나라를 찾는 이유는 새롭고 신기한 것을 바라서가 아니다. 보편적 이야기 문법이 주는 낡은 위안을 원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이야기를 경험하는 방식은 진화할 것이되, 스토리텔링 애니멀인 우리는 네 발로 걷게 되지 않는 한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이야기의 동물로 만들고 이야기의 화려하고 신나는 역동성을 선사한 천재일우의 환상적 진화 과정을 찬미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의 힘을 이해하고 이야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중요한지를 알더라도 이야기의 매력은 조금도 줄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지금 소설에 빠져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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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가 인간을 이야기에 매료된 동물로 정의했던 것이 인상깊었다. 그래서 제목을 보자마자 사둔 책인데 뒤늦게 읽었다.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이 여러모로 신선하고 유쾌해서 좋았다. 꿈에서부터 기억과 미래 예측, 인간이 향유하는 모든 형태의 이야기에 대한 전망까지.

시, 연극, 영화, 드라마, 노래 등등 온갖 형태의 이야기에 탐닉하는 중독자의 마음에 여간 쏙 드는 논픽션이 아닐 수 없다.

이야기가 불멸할 거라는 선언이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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