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10번 출구와 '여성'

강남역 10번 출구와 '여성'


한겨레

강남역 살인사건이 뜻밖의 양상으로 치닫고있다. 뚯밖이 아니라 어쩌면 예견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으로 본격화된 여혐, 여혐혐, 남혐 등이 음지라면 음지일 온라인상에서 폭발적으로 과열되면서 분출구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회원들, 극성 페미니스트들의 논쟁이 아니라 모든 여성 개개인이 짊어진 문제라는 점을 상기할만 계기가 있어야했다. 이 기형적인 젠더 담론이 액션으로 체화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다음 단계'였다. 이 단계를 겪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매우 흥미롭다. 평소 유보해왔던 '여성주의'나 '젠더'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기엔 아주 알맞은 때라는 확신이 생겨 되는대로 정리해본다.

우선 그동안 용어의 모호함이 갈등을 증폭시켜왔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논쟁의 한가운데 선 단어는 '여성혐오 (여혐)'이다. 우리말 '혐오'가 주는 특유의 의미에다가 일베와 메갈리아의 대결 구도 속에서 '여혐'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본래 뜻보다도 거북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많은 부분이 생략되고 함축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건을 다루면서만큼은 'Misogyny'라는 영어 단어로 대신해봤으면 한다. Misogyny는 여성에 대한 혐오, 증오는 물론 차별, 비하같은 보다 넓은 범위의 개념을 내포한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대하지 않고 객체로 여기는데서 비롯되는 모든 불합리와 사소한 습관,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폭력, 가부장주의 등이 모두 해당한다.

"'김여사'가 차를 몰고 나왔다", "어디 여자가 함부로 나서", "선머슴같고 여성스럽지 못해", "조신하지 못한 옷차림을 하면 성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당연히 딸이 해야지",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성형한거야".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말들을 들어야 한다. 대개는 여성, 여자, 딸이란 단어들을 남성으로 바꿀 경우 어색해지는 문장들이다. 많은 여자들이 "조심히 들어가" "도착하면 연락해"라는 말로 작별인사를 하고, 택시에 타자 마자 택시번호를 찍어보낸다. 밤길을 걸을 때면 뒷따르는 발자국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몰카가 있지 않은지 두리번거린다. 남자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 주변의 숱한 충고들과 조언, 그녀가 겪어야 했던 일상의 수많은 불편함, 그 모든 것의 뿌리까지 파헤쳐 내려가다 보면 Misogyny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렇게 곱씹어보면 '여혐'을 과민반응으로 치부하는 여성, 남성들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Misogyny를 부정하기는 힘들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다. 내가 겪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다. 다만, '젠더 감수성'이 부족했고, 둔감했던 거다. Misogyny로 가득찬 사회에서 구조적인 피해를 입은 많은 여성들이 알아서 조심하기 바빴거나, 이 문제를 회피하고 외면했거나 스스로 '명예 남성'이 되어 불편함을 무마하고자 했다. 이런 태도 자체가 Misogyny 영향 아래의 자기 검열이다.

그렇다면 왜 이번 일이 분화구가 된 걸까. 이번 사건은 일상적인 '위험지대'로 여겨지지 않던 뜻밖의 장소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왁자지껄한 강남 번화가의 깔끔한 신식 건물에서 남자친구와 시간을 보내다가도 혼자 화장실에 가면 칼에 찔려 죽을 수 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 이미 여러가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명제들을 받아들이고, 학습하고, 행동해왔지만 임계점을 무너뜨리는 충격이었다. 그렇게 돌이켜보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너무나도 위험했고, 조심했고, 억울했고, 두려웠고, 아파했고, 불편해왔던 거다. 여성주의나 페미니즘같은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고 젠더 논쟁을 남의 일로 여기던 많은 보통 여성들까지도 공감하며 강남역 10번출구로 쏟아져나온 이유다. 젠더 논쟁은 더이상 누군가의 입씨름이 아닌 '나'의 생존 문제가 됐다.

이번 사건이 범죄심리학적으로는 '증오(혐오)범죄 Hate Crime'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게 경찰의 공식적인 의견이다. 조현병이라는 정신질환 때문에 여성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가졌고 살인도 저지른 것이지 '여혐' 때문에 사람을 죽인 건 아니란 거다. '묻지마 살인'이라고도 칭했지만 살인자는 '여자'를 표적삼아 기다려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그의 사고방식은 정신병력에서 탄력을 받아 극대화됐을 뿐이지 전형적인 Misogynist 들의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 여자가 천천히 걷는 바람에 지각했다, 어머니도 여자라서 어머니가 빨아다준 옷을 입지 않는다, 여자들이 내 친구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다. 유독 여성에게 악의를 품은 데는 '감히 여자까지'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보다 응당 더 '약하고, 불완전하고, 열등한' 여자들까지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데 겉잡을수 없는 분노를 느겼던 거다. 이런 생각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품게 한 사회, 가정 환경 등 모든 게 Misogyny와 맞닿아있다.

그걸 많은 여성들이 비로소 더이상 외면하지 못하고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행동에 나섰다. 살인자 한 사람의 죄값으로 떠밀 게 아니라 근원적인 문제를 찾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여자들을 움직였다. '여성혐오'를 멈춰달라는 호소다.  인격체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고 부당한 폭력에서 벗어겠다는 선언이다. 모두가 함께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자는 외침이다. 남성을 혐오한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남성이 잠재적인 범죄자라는 것도, 남성을 짓밟고 우월함을 과시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마냥 성 갈등 구도로 몰아갈 일이 아니라 함께 생각해 볼 문제로 여겨야 한다. 그동안 여성들이 참아온 삶은 어떠했는지,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걸 고칠 수 있는지 고민해보자는 거다. 그래서 이번 일이 가져온 파장과 현상은 이 자체로 매우 의미가 있다. 여성을 비롯한 한국사회의 모든 소수자문제를 두고 볼 때 기념비적인 일이 될 것이다.

언론에게도 원죄가 있다. 통렬히 반성해야 할 문제다. 언론은 그동안 너나할 것 없이 조회수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자극적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마구잡이로 녀(女)자를 갖다붙였다. 만취녀, 100억녀, 성형녀, 개념녀... 애초에 이번 사건이 메갈리아 등의 분노를 산 것도 초기 보도 제목들 때문이었다. 장기적으로는 디폴트를 남성으로 두고 여성의 성별만 표기하는 여러 매체의 표기법같은 것들도 개선돼야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많은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할때, 인류의 역사화 함께 시작돼 뿌리깊게 체화된 Misogyny의 불합리들, 거기서 파생되는 사회적 손실들을 막아낼 수 있다. 익숙한 것을 뒤집어 보는 발상의 전환은 괴롭고 지난하지만 생산적이고 인간다운 일이다. 인류는 그렇게 발전해왔다.

아래는 공감하며 읽었던 글, 기억해야 할 글들이다.


댓글

  1. 자매님 잘 읽었읍니다...우리 참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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