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


  •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
  • 미셸 투르니에 (Michel Tournier)
  • 민음사(2012)



주의력의 한계는 점점 깊어지는 동시에 좁아졌다. 이젠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골몰한 한 가지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옮겨 가는 일마저 점점 더 어려워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타인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강력한 주의력 전환 요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45

오직 과거만이 중요한 존재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현재는 추억의 샘, 과거의 생산 공장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산다는 것은 오직 그 값진 과거의 자산을 늘리기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죽음이 오는 것이었다. 죽음은 그 축적된 금광을 향유할 수 있는 순간에만 진정한 죽음이었다. 우리가 소란스러운 현재 속에서 보다 더 깊이 있게, 주의 깊게, 현명하게 감각적으로 삶을 음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다.
p.50-51

글을 쓴다는 이 성스러운 행위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갑자기 지금까지 빠져 있었던 동물성의 심연으로부터 반쯤 헤어 나와 정신세계로 진입한 느낌이었다.
...
그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그가 수치스럽게 여기고 잊어버리고자 하는 실수의 시절이 지나간 다음 이 섬에서의 진정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p.56

나의 상황은 미덕에 최대를, 악덕에 최소를 걸며 용기와 힘과 자기 긍정과 사물들에 대한 지배를 미덕이라고 부르기를 요구한다. 악덕은 포기와 체념, 즉 진창이다. 그것은 아마 기독교 저 너머 인간적 지혜의 고대적 비전으로 되돌아가서 오늘의 미덕(Vertu)에 고대의 덕성(Virtus)을 대체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어떤 기독교의 심저에는 자연과 사물에 대한 근원적 거부가 도사리고 있다. 나는 스페란차에 대하여 그 거부를 지나치게 실천에 옮겼던 것인데 그것은 나의 멸망을 초래할 뻔했다. 반대로 나는 오직 이 섬을 받아들이고 이 섬이 나를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타락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p.63

나의 내부에는 잉태 중에 있는 질서의 세계(코스모스)가 있다. 그러나 잉태 중의 질서의 세계란 바로 혼돈이다. 이 혼돈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 통치된-이 분야에서는 오직 전진함으로써만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으므로 점점 더 잘 통치된-섬은 나의 유일한 피난처이며 유일한 보증이다.
p.144

존재를 향한 비존재의 엄청나고 공통된 열망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미지, 몽상, 계획, 환영, 욕망, 고정관념처럼 밖으로 떠밀어내는 구심력 같은 것이다. 존재하지(ex-siste) 않는 것이 고집한다(in-siste). 존재하려고 고집한다. 그 모든 작은 세계가 큰 세계, 진정한 세계의 문으로 밀려든다. 그런데 그 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은 타자이다.
p.159


=

존재, 시간, 타인, 질서, 미지에 대한 고민.
물론 로빈슨크루소가 없었다면 이런 작품이 나오기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봤다. 그래도 여전히 더 공감가고 고민이 남는 건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방드르디다.

몇번 더 읽어봐야겠다. 로빈슨크루소랑 같이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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