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일년이라는 시간을 그저 흘려보냈던걸까. 남은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돌아설만큼 치기어린 무모함이 남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돌보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면 지금의 기분을 찰나의 충동이나 철없는 불만족에서 오는 응어리라고 치부할수만은 없다. 100세 시대라는데 나는 고작 스물 여섯. 이제 막 봄을 지나 초여름에 접어들었다. 겁에 질려 진짜 나를 외면하기엔 남은 날이 무수하다. 행복하고 싶다. 가지 않은 길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다.

Newseum, 기자부심을 느끼는 시간

일을 마무리하고 본격 관광에 나선 첫날, 비가 온다기에 안으로만 다니는 일정을 잡았는데 날은 쾌청했다.  NEWSEUM 인상적이었다. 두어 시간 둘러보면 끝날 줄 알았는데 볼거리가 예상보다 많았다. 네시간을 보내고도 아쉬움이 남을 줄이야. 프레스카드를 본 직원이 저널리스트 할인을 해 줘서 기분도 좋았다. 주로 미국 언론의 발자취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레오파지티카부터 오늘자 세계 조간 1면에 이르기까지 뉴스가 지나온 족적을 훑을 수 있는 이례적인 공간이었다.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언론 관련 인용문은 문장의 아름다운 힘을 내뿜고 있었다. 몇 군데 전시실에서는 주책맞게도 눈물이 났다. 마음이 점점 나약해지는건지 그래도 아직 때가 덜 타서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911 테러 보도에 대한 전시관 앞에는 크리넥스 티슈 한통이 무심한 듯 놓여있었다. 그 정물에서 무심한체 하는 사소하지만 따듯한 배려가 느껴졌다. 이 참사는 '민족'이라고는 부를수 없는 이 나라 국민들에게 얼마나 버거운 공동의 기억이었을까. 완전한 타인인 내 피부로도 그 비통의 무게는고스란히 전해졌다. "BASTARDS!" 정제되지 않은 헤드라인으로 절규할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마음들은 살아있는 역사가 됐다.  퓰리처관에서도 눈물이 났다. 찰나에 스러져갈뻔한 진실들이 프레임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사진은 정말이지 가장 강력한 무기다. 백마디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힘을 사진은 가지고 있다.  여러모로 기자질 한번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이 공간과 시간 사이에서 꿈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당장 마지막 전화인터뷰 녹취 푸는 일은 끝끝내 미뤄두고 있는 나다. NATIONAL GALLARY 유럽 있을 때 그림이라면 진절머리가 나도록 봤지만 그래도 지나칠 순 없었다. 평소 보고싶었던 인상파 작품 일부를 소장하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서관을 둘러보는데 끊임없이 길을 잃는 바람에 모든 전시실을 제대로 본건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래도 대강 보고싶었던 작품은

두번째 출장지, Washington D.C.

총맞고 얼떨결에 타클로반 피해 취재하러 필리핀으로 날아간 지 6개월이 채 안 됐는데 또 출장을 왔다. 사스마리 치고 잦은 출장이다. 이번엔 그래도 내가 준비한 기획으로 떠나는 출장이라 하고자 하는 바가 많다. 꼬박 하루가 흘렀다. 정신없이 24시간이 지나가버렸다. '미국 동부 폭설'은 기사 속의 활자를 넘어 내게 급습해왔다. 비행기가 6시간 가까이 연착된 것도 모자라 공항에 내려 짐 찾는 데만 두시간이 걸렸다. 지하철 타고 호텔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무려 택시를 타는 만용을 나는 부렸다. 혼자서 섭외의 장벽을 기어넘고 통역도 없이 급하게 미국으로 날아오느라 벌써 지친 기분이다. 왠지 모르게 외롭기까지 하다. 시차 때문에 이사람 저사람 붙들고 중얼거리기도 쉽지 않다. 예정됐던 인터뷰 두 건은 잘 마쳤다. 영어는 줄곧 잘 되다가도 인터뷰이한테 중요한 질문만 할라 치면 배배 꼬였다. 점점 더 많은 능력들이 내게서 우수수수 빠져나가는 것 같다. 아쉬운대로 녹취 딕테이션 하고 번역하는데 사활을 걸어야지.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는 녹취한 인터뷰 풀고, 번역하고, 받아온 자료들 번역하고 정리하는 데 집중할 생각이다. 밖에도 안 나갈 요량으로 마트에서 과일, 요거트, 물 따위를 샀다. 수요일쯤 핫라인 센터 한군데 정도만 더 들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기사 한 회는 쓰고도 남을 것 같다. 계획은 목요일오후부터는 신나게 놀다가 귀국하는건데 생각처럼 잘 될런지는 모르겠다. 타클로반 취재 마치고도 하루 반쯤 세부에서 시간이 있었지만 피로 풀고 잠 자는데 시간 다 쏟았었는데. 이번엔 기를 쓰고라도 돌아다니다 비행기 타기로 결심해본다. 돈 아끼지 않고 먹을것 잘 먹고 오리라 다짐했었는데 호텔 레스토랑은 생각보다 맛이 없고 주변에도 먹을만한 곳이 보이질 않는다. 팁 계산하는 법은 어렵기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여행을 다니면 식욕이 사라지는 억울한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배도 많이 고프지 않다. 샌드위치, 과일, 요거트 이런걸 주식 삼

천국보다 낯선, 이장욱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떨어진다. 행인들이 우산을 펴 드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자사로, 다른 표정으로, 다른 각도로, 우산을 펴 든다. 풍경이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 나는 인생이라는 단어에 호의적인 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인생도 멸시받아서는 안 되며, 각각의 인생은 각각의 방식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인생이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인생의 끝 역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어 슬픔을 표하는 것, 그것은 같은 시간을 지나온 인간으로서 불가피한 일이다. 그것 자체가 문명의 형식이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p.10~11 어떤 비극은 리듬조차 견디지 못한다. 그것이 리듬의 탓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비극의 탓은 더더욱 아니다. p.12 사랑은 때때로 우리를 구원하지만, 아니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세계의 진실이란 밤처럼 냉정한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사랑이 완전하게 사라진 상태에 가깝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 것은, 대개 이미 늦은 다음이지만. p.29 영혼의 거죽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고요한, 그러나 들끓는 심연이 있다. 그 심연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밤의 호수처럼 아름답고, 때로 밤의 늪처럼 두려울 뿐이다. 심연은 이 세계의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 심연, 호수, 늪을 기록하는 것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정치니 법이니 신문 기사 같은 것들의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실연 때문에 자살했다느니, 실업을 비관해 투신했다느니, 원한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느니 하는 말들을 거의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표면만을 부유하는 그 언어들을 인간에 대한 모독으로 느꼈기 때문에...... 소설이

최영미,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멀리멀리 져버리고 보일듯말듯 속히 잊혀지기를. 송구영신의 달이 왔으니 이제는 let bygones, be bygones. 둥글고 단단하게 여물도록 하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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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컴퓨터였다면 클릭 한번으로 다 잊어버릴텐데. = How was your day? 카메라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라는 도시를 훑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측벽이라는 조금은 낯선 개념도. 마음을 열듯 측벽에 제멋대로의 창을 뚫었을 때 맞은편에서 운명의 상대가 미소짓고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 것인가. 만나야 할 사람들은 언젠가 기어코 만나고야 마는 것일까. 나도 월리를 찾아 도시를 정처없이 헤메어야겠다 . 무엇보다, 남미에 가고싶어졌다.

어바웃 타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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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모두가 함께 하는 여행이다. 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다. We are all travelling through time together, everyday of our lives. All we can do is do our best to relish this remarkable ride. Live life as if there were no second chance. 인생은 누구나 비슷한 길을 걸어간다. 결국엔 늙어서 지난날을 추억하는 것뿐이다. 결혼은 따듯한 사람하고 하거라. = 시간을 되돌린다면, 과연 나는 모든 일들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을까. 지나고 난 뒤에 후회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난 실수와, 지난 미숙함과, 지난 오해들로 상처를 주고받은 일은 셀 수조차 없을 것이다. 요즘 계속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때그때의 내 작은 실수들, 작은 소홀함, 작은 무심함이 모여서 마음을 조금씩 깎아내렸을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자주 실망을 안겨주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에 최선의 성의와 예의를 갖춰 삶을 만끽해야 한다. 맞는 얘기다. 그만큼 알고 있으면서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만끽'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려운 말이다. 순간을 만끽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뒤늦은 사과를 하고 싶지만 방법은 없다. 지금은 먹먹하기만 한 지난 날들도 언젠가 추억으로 넘겨버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추억과 마음 사이의 온도차를 극복하기 위해 아마도 매일매일 나는 좀더 부지런하게 주어진 순간을 살아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