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낯선, 이장욱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떨어진다. 행인들이 우산을 펴 드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자사로, 다른 표정으로, 다른 각도로, 우산을 펴 든다. 풍경이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
나는 인생이라는 단어에 호의적인 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인생도 멸시받아서는 안 되며, 각각의 인생은 각각의 방식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인생이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인생의 끝 역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어 슬픔을 표하는 것, 그것은 같은 시간을 지나온 인간으로서 불가피한 일이다. 그것 자체가 문명의 형식이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p.10~11

어떤 비극은 리듬조차 견디지 못한다. 그것이 리듬의 탓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비극의 탓은 더더욱 아니다.
p.12

사랑은 때때로 우리를 구원하지만, 아니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세계의 진실이란 밤처럼 냉정한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사랑이 완전하게 사라진 상태에 가깝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 것은, 대개 이미 늦은 다음이지만.
p.29

영혼의 거죽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고요한, 그러나 들끓는 심연이 있다. 그 심연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밤의 호수처럼 아름답고, 때로 밤의 늪처럼 두려울 뿐이다. 심연은 이 세계의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 심연, 호수, 늪을 기록하는 것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정치니 법이니 신문 기사 같은 것들의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실연 때문에 자살했다느니, 실업을 비관해 투신했다느니, 원한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느니 하는 말들을 거의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표면만을 부유하는 그 언어들을 인간에 대한 모독으로 느꼈기 때문에...... 소설이 없다면 그 버려진 심연들은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p.75~76

사랑은 사랑의 대상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향한 열정과 환멸을 견뎌 내는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어떤 사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어떤 사랑은 대상 자체가 되는 데까지 나아간다. 나와 그것의 구분을 지우는 것. 경계를 없애는 것. 그러면 그것의 장점이나 단점 같은 걸 따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완성을 선언하거나 파산을 선고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환멸의 차가움도 염원의 뜨거움도 희미해져 버린다. 마치 일상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러한 것처럼.
p.88

세계는 명료하다. 세계에는 모호함 따위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모호하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명료함이 부족하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비밀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따. 우리는 그런 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명료한 세계와 모호한 인간 사이에 중간 지대 같은 것은 없다. 명료한 세계 속에서 모호한 인간들의 권력투쟁이 끝나지 않을 뿐이다. 모호한 의미를 규정하고 장악하려는 인간들간의 싸움이다. 인간이 명료함의 일부가 되는 것은, 죽음의 순간뿐이다. 그것은 더 이상의 모호함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이다. 모호함이 제로에 도달하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명료해지는 순간이다. 인간이 세계 자체가 되었으니까.
p.115

균열이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그 균열에 밀어 넣는 행위이기 때문에, 사랑은 아름다운 것 아닌가.
...
나는 어렴풋한 회의에 빠져들었다. 균열이니 결핍이니 하는 것은 단지 정신의 불순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사랑은 단지 사랑일 뿐인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p.117

나는 신념이 강한 사람들을 존중하지만, 그들과 진심으로 가까워진 적은 없다. 근육질의 영혼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그들의 것이다. 회의주의자들의 선병질적인 영혼이 아름다울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신념가들과 함께 있으면 나의 깊은 곳 어딘가에서 거부반응이 시작되곤 했다. 알 수 없는 신호 또는 몸의 작용. 본능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나는 나조차도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의심하는 데 익숙하여, 인생의 대부분을 그 의심의 심연에서 보낼 것이다. 스스로를 의아해하는 인간, 믿음이나 사랑이 도착할 수 없는 영혼의 플랫폼.
p.173

나는 너라는 물속에 잠겨 자라는 식물이라고, 너라는 계절을 떠가는 텅 빈 구름이라고, 너라는 감정의 끝에서 끝까지 뛰어갔다 돌아오기를 좋아하는 강아지라고, 너의 발끝에서 머리카락 끝까지를 섬세하게 핥고 싶은 어린 고양이라고...... 나는 단지 너의 그림자라든가 메아리 같은 것이라고......나는 너의 효과에 불과하다고...... 나는 말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침묵은 깊고 길었다. 나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침묵은 감옥 같았다.
p.188~189

나는 인생에 별다른 기대가 없다. 나는 내가 시간 속에 생긴 하나의 흠집 같다고 느낄 뿐이었다. 나는 거짓에 익숙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진실에도 익숙하지 않다.
p.191




=

안팎의 경계를 조롱하는 이 모호함이 나는 마음에 든다. 툭툭 끊어치는 섬세하면서도 차가운 문장들이 마음에 든다. 문장 하나하나에 가슴이 뛰었던 것이 얼마만이던가. 말들은 시와 이야기 사이 어딘가에서 낯선 기운을 발산한다. 탐난다.
정말이지 '우리 소설의 신 서사'다.

알게 모르게 머릿속을 떠나니던 어떤 관념들에 대한 정의, 현상들에 대한 판단까지도 작가의 문장을 힘입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좋다.

다작해 주시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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