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김석희 옮김/ Humanist


인간의 가장 추악한 성향만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성향도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고정된 인간 본성이 아니라 인간을 만들어내는 사회 과정의 결과다.
...
사실 인간 자체가 인류의 부단한 노력이 낳은 가장 중요한 창조물이자 성취이고, 그 기록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p.29

외부 세계와의 관계는 고귀할 수도 있고 하찮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천박한 행동 양식과 관계를 맺더라도 혼자인 것보다는 훨씬 낫다.
p.35

인간은 태어났을 때는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무력하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응은 본능의 결정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학습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본능은...... 고등동물. 특히 인간에게는 사라지는 범주는 아니라 해도 약해지는 범주다."
...
하지만 인간의 무력함이야말로 인간의 비약적 발전의 발판이 된다. '인간의 생물학적 약점은 인간 문화의 조건이다.'
p.47

인간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혼자 고립되어 있지도 않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바꿀 수도 없고 의심할 여지도 없는 확실한 자리를 사회에 갖고 있으면, 인간은 구조화된 전체에 뿌리를 박고, 따라서 삶은 의심할 여지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사람은 사회에서 자신이 맡고 있는 역할과 동일시되었다.
p.56

봉건 사회아를 중세적 체제의 붕괴는 모든 사회 게급에게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개인이 홀로 남겨지고 고립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은 이제 자유로워졌다. 이 자유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인간은 그때까지 누렸던 안전성과 의심할 여지없는 소속감을 박탈당했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전을 추구하는 그를만족시켰던 세계로부터 강제로 떨어져나왔다. 그는 고독과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도 있었고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p.108

'신에대한 개인주의적 관계는 인간의 세속 활동이 지닌 개인주의적 성격에 대한 심리적인 준비였다.'
...
인간은 지난 400년 동안 자신을 위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하지만 그가 자신의 목적이라고 생각한 것의 대부분은 그의 목적이 아니었다. 적어도 여기서 말하는 '그'가 '노동자'나 '제조업자'가 아니라 모든 감정적/지적/감각적 잠재력을 지닌 구체적인 인간을 의미한다면 그렇다.
p.119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은 놀랄 만큼 강해졌지만, 사회는 자기가 창조한 그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기가 만든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 만든 세계가 그의 주인이 되었고, 그 주인 앞에 인간은 고개를 숙이고, 될 수 있는 한 아양을 떨며 속이려 애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 인간의 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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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여전히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환상을 품지만, 일찍이 선조들이 신에 대해 의식적으로 느꼈던 무력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p.128

고독감과 무력감은 쥘리앵 그린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나는 우리가 우주에 비해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를 압도하는 동시에 안심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의 사고 범위를 넘어서는 그 수치나 차원들은 완전히 압도적이다. 도대체 우리가 잡고 매달릴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있을까? 우리는 환상들의 혼돈 속에 거꾸로 던져지지만, 그 혼돈 속에서는 진실로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나머지는 모두 무()이고, 공()이다. 우리는 거대한 암흑의 심연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p.142-143

모든 권위주의사상의 공통된 특징은 삶이 인간의 자아와 관심과 소망과는 무관한 외부의 힘으로 결정된다는 확신이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은 그 힘에 복종하는 데 있다.
p.180

삶은 그 자체의 내적 활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성장과 표현과 생존을 추구한다. 이 경향이 방해를 받으면 삶을 향한 에너지는 분해 과정을 거쳐 파괴를 향한 에너지로 바뀐다. 다시 말하면 삶에 대한 충동과 파괴에 대한 충동은 서로 독립된 요소가 아니라 반비례적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삶에 대한 충동이 방해를 받을수록 파괴를 향한 충동은 강해지고, 삶이 더 많이 실현될수록 파괴성의 정도는 줄어든다. '파괴성은 실현되지 않은 삶의 소산이다.'
p.192

'자유'라는 이름으로 삶은 모든 구조를 잃어버린다. 삶은 수많은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조각들은 따로따로 분리되어, 하나의 전체로서는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개인은 조각그림 맞추기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이 조각들을 끌어안은 채 혼자 남겨진다.
p.258

근대인은 원하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고,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지만 그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근대인의 유일한 문제인 듯하다.
...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가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어떤지를 생각지 않는다.
p.259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은 악순환을 이루지 않고, 인간은 자유로우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고, 비판적이지만 의심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 있고, 독립적이지만 인류를 구성하는,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이 적극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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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자신의 죄수인 본성을 감시하는 간수가 됨으로써 그 자신도 죄수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인격의 두 측면인 이성과 감정은 둘 다 절름발이가 되었다. 자아의 실현은 사고 작용만이 아니라 인격 전체의 실현을 통해, 즉 감정적 잠재력과 지적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 잠재력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지만, 겉으로 표현되는 만큼만 현실이 된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자유는 통합된 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는 것이다.'
p.265-266



=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로서, 나는 어떤 자유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것일까.
후대가 지금 이 시대를 돌아보면 '현대인'들은 전부 어디서부터 어디로 탈주했다고 여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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