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병 잘 가요

“네가 한알의 밀알 되기를… 사랑한다, 아들아”


“4월 5일 네가 전화했을 때. ‘엄마 (면회) 오지 마. 4월은 안돼’ 했을 때. 미친 척하고 부대로 찾아갔더라면…. 면회가 안 된다는데 찾아가면 혹시 너에게 불이익이 있을까봐 엄마는 그저 주저앉고 말았단다. ○○야, 정말 미안하다. 바보 같은 엄마를 용서해라.”

육군 28사단에서 선임병들의 가혹행위로 숨진 윤모(20) 일병의 어머니 안모(58)씨가 8일 저녁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 갔다. 군인권센터가 주최한 ‘윤 일병과 또다른 모든 윤 일병들을 위한 추모제’에 참석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아들의 전화를 받고도 혹독한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던, 혹시 아들이 불편할까봐 꾹 참고 면회를 포기했던 엄마는 한맺힌 눈물을 흘렸다.

안씨는 오후 9시20분 한손에 손수건을 들고 추모제 무대에 섰다. 흐느끼며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사랑하는 아들. 네가 하나님 품으로 떠난 지 벌써 넉 달이 지나고 있구나. 엄마는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제발 꿈이었다면….”

아들의 ‘사고’를 접한 날은 이렇게 회고했다. “4월 6일 네가 의식을 잃고 이송되고 있다는 비보를 듣고도 병원으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 이런 생각을 했단다. 훈련소 퇴소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한 네가 얼마나 가족이 보고 싶었으면, 하나님이 이렇게라도 네 얼굴을 보여주시려고 한 게 아닌가.”

한걸음에 달려간 병원 응급실에는 “너무나도 참혹한 모습으로 힘없이 누운” 아들이 있었다. 그 모습에 안씨는 “하늘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했다. 하루하루 고통과 피눈물로 살아간다는 어머니의 고백이 이어지자 다른 희생자 유족과 시민들도 울음을 터뜨렸다.

안씨는 “늘 부족했던 부모에게 불평 한번 않고, 장학금을 받고, 방학이면 개학 하루 전까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부모님 용돈까지 챙겨주던 속 깊은 아들”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네가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썩어져 널 통해, 너의 죽음을 통해 다시는 너와 같은 제2, 제3의 윤 일병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다. 남은 생을 너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 편지를 끌어안고 눈물을 닦는 안씨에게 응원의 박수가 쏟아졌다.

오후 7시30분 시작된 추모제에는 상관의 성추행에 자살한 여군 오모 대위 유족, 훈련소에서 뇌수막염으로 사망한 노모 훈련병 유족, 11사단에서 뇌종양으로 숨진 신모 상병 유족 등이 참석했다.

신 상병의 누나는 “기본적인 의료권도 보장받지 못했다. 그렇게 가해한 사람은 아무 처벌도 안 받고 우리 애 장례식 날 파티를 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용서가 안 된다”고 말했다. 오 대위 아버지는 “올 봄 결혼할 애를 갖다가 성폭행했다. 왜 그랬겠나. 군대니까 그렇다. 부모님들, 나처럼 당하고 후회하지 말고 군대를 절대 믿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이 자리는 윤 일병을 향한 추모예배로 마무리됐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독실한 크리스천인 윤 일병이 교회에 정말 가고 싶어 했는데 누가 멍 자국이라도 볼까봐 교회에도 못 가게 했다”며 “윤 일병이 그렇게 바랐던 예배로 마지막 시간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유족과 시민 등 참석자 70여명은 국방부 안으로 보라색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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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지키라고 떠나보낸 자식들이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고 시신으로 돌아왔다. 부모들은 국방부 앞에 주저앉아 주먹으로 땅을 치고 가슴을 때리며 꺽꺽 울었다. 

남편은 "우리 예쁜 아가도 커서 군대에 갈까요?"하고 묻는 아내에게 "그땐 세상이 변해있을거야"라고 대답했단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입대한 아들은 제대로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앓다 숨졌다.

결혼을 앞두고 상관의 성추행과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군 대위도 있다. 아빠는 휴대폰 속 앳된 딸의 증명사진을 어루만지며 얼굴을 크게도 해 놓고 보고 볼을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휴대폰 속 딸 사진이 다음 사진으로 넘어갔다. 사망진단서였다. 눈이 벌개진 아빠는 자꾸만 다시 사진을 넘겼다. 

또다른 윤일병들이 이미 너무 많다. 언젠가는 세상이 정말로 변할까.
여름밤 바람을 맞으며 나는 우리 아들만큼은 군대에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20여년이 지난 뒤에는 어떻게든, 조금은 달라져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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