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좀비 산책


좀비 산책

이장욱


비가 내리자
나는 드디어 단순해졌다
당신을 잊고
잠깐 무표정하다가
아침을 먹고
잤다

낮에는 무한한 길을 걸어갔다
친구들은 호전적이거나 비관적이고
내 몸은 굳어갔다

한 사람을 살해하고
두 사람을 사랑하고
잠깐 울다가
음악을 들었다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나의 죽음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금욕적이며
장래 희망이 있다

1968년이 오자
프라하의 봄이 끝났다
레드 제플린이 결성되었다
김수영이 죽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여전히 태어나지 않았다
비가 내리자
나는 단순하게
잠깐 울다가
전진하였다



=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래 희망이라는 틀에 박힌 단어로 위안삼으면서.
울음조차 잠깐인 채로 그러나 무얼 위해 전진하는 지 모르는 상태로 그저 떠도는 것은 아닐까.
나의 사랑은, 나의 죽음은 변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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