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장욱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장욱
문학과 지성사(2015)


아름다운 건, 하루오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그게 하루오의 말이었는데, 어딘지 건조한 그 말이 그때는 아주 조용하고 희박한 공기처럼 느껴져서, 뭐라고 더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녀가 젖은 눈을 손바닥으로 받으며 가만히 말했다.
작은 사랑이 하나 지나간 느낌이었어....... 라고.
p.36
<절반 이상의 하루오>


그에게 혼잣말을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자신이 고독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죽은 사람들은 언제든 영화처럼 돌려볼 수 있어서 좋다......고, 알은 또 엉뚱한 말을 중얼거렸다. 생각이 먼저 있어서 말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온 뒤에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p.81

이름이란, 아무렇게나 흐르지 않도록 사람을 붙들어두는 작은 닻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p.86

니콜라의 말투에 약간의 슬픔이 배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이미 익숙해져서 몸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좋은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은 체온에 가까워서 아무리 반복해도 더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은 알고 있었다.
p.88
<올드 맨 리버>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생이 아니다.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때문에,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나에게 얘기하는 것인지 황혼에게 얘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p.127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그녀는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불꽃이 점화되었다가 천천히 식어가는 과정이라고 믿는 낭만적 허무주의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정귀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귀보 씨는...... 멀리 있어야만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
정귀보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남긴 말은 여러 면에서 암시적인 것이었다.
안녕. 아름다운 동화에서 한 페이지를 찢어냈는데도 이야기가 연결되는 느낌으로, 그렇게 살아갈게.
p.153

모든 면에서 정귀보는 사랑에 충실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충실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귀보의 세번째 또는 네번째 사랑은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고 물거품이 되었다.
p.165

"죽음은 삶 전체를 드러내는 무한한 거울이다."
"죽음은 단순한 없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신비이자, 무한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을 것이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등등.
p.173
<우리 모두의 정귀보>


이봐,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과학자인가, 시인인가, 혁명가인가. 홀로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가 그는 아름다운가, 무책임한가. 인간을 신뢰핟지 않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비밀스러운 기원이라는 걸 알고 있나. 구원이란 인간의 자유의지가 완전하고 궁극적으로 부정되는 순간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있나. 꽃은 그렇게 피어난다. 아름답고 또 위험하게. 레닌이 옳았는가, 마르토프가 옳았는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옳았는가 베른슈타인이 옳았는가? 죽은 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지리놉스키는 멍청이이며, 자본주의는 혐오스럽다. 스피노자는 매혹적이고 무기력했으나, 일생 동안 어두침침한 방에서 안경렌즈를 매만지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p.267

이봐, 아름답고 잊히지 않는 단 한 줄의 소설을 써보게.
또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끔직한 시를 말이야.
이 악몽에 대해서.
이 악몽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
또는 무엇의 악몽인지에 대해서 말일세.
p.286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

이장욱의 시나 소설은 언어의 아름다움을 향한 몽상 같다. 깊이 빠져들어서 그 안을 헤메이게 한다. 의미 없이 아름답기만 한 듯한 단어 하나, 어구 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모여서 말의 지도를 그린다. 그 지도는 독자를 미지의 세계, 순수한 진리의 한 귀퉁이로 독자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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