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내전, 김웅

검사내전
김웅 / 부키


논리와 이성의 천적은 부조리가 아니라 욕심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주성분은 욕심, 욕망, 욕정이다. 우리는 '욕심'이라는 거친 바다 위를 구멍 뚫린 '합리'라는 배를 타고 가는 불안한 존재들이다. 마땅히 쉼 없이 구멍을 메우고 차오르는 욕심을 파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욕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허세를 부린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으로부터 논리와 이성을 지켜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p.63
- 욕심이라는 마음 속의 장님


일당들이 구속된 후 나는 서울중앙지검을 떠나기 전에 영민 씨를 불렀다. 그에게 뭔가 멋진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가령 '정의는 지각할 수 있지만 결근하지는 않는다'라든가, '법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신들이 딛고 서 있기 때문이다'라든가 하는 나도 믿지 않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바보 같게도 나는 그에게 살다 보니 세상이 다 사기 같다고 말했다. 영민 씨같은 사람에게 세상은 더욱 그렇다고 했다. 청년에게 희망을 주라는 말도 사기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식들에게 희망이 아니라 특혜를 준다. 청년에게 위로를 건넨다는 교수나 종교인도 정작 관심은 돈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정의와 법치주의를 부르짖는 검찰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사기의 주연일지 모른다. 어쩌면 개처럼 일하는 형사부 검사들의 선의와 신실함이 이 사기의 가장 화려한 기술로 악용되었을지 모른다. 그레서 세상은 늘 영민 씨 같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과 기대를 훔쳐 가는지 모른다.
p. 109
- 국가대표 영민 씨의 슬픈 웃음


하지만 블랙박스가 거짓말을 고쳐주었듯, 시간이 지나 그 상처를 치유해 준 것도 있었다. 우연히 만난 애덤 스미스의 말이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이타심은 건물의 장식품과 같다고,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서 사회가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정의는 건물의 기둥과 같은 거라서 그것이 없어지면 건물이 무너지듯 사회도 무너진다고. 아름다운 결론은 아니지만 블랙박스처럼 유용한 위로였다.
p.135
- 착한 사마리아인의 거짓말


형사부 검사는 다른 인생의 찢어진 틈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꿰매는 직분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찢어진 구두를 꿰매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찢어진 가슴을 꿰매주기도 한다. 더러는 서툰 솜씨로 찢어진 상처를 더 헤집기도 한다. 그래서 쉽지 않은 일이다. 손과 얼굴에 피 칠갑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소년 사건은 그 찢어진 상처도 크고 후유증도 깊어 검사의 관심과 성의가 더욱 필요했다.
p.182

인권 의식은 자신이 귀중하다는 인식이 아니다. 자기가 소중하다는 것은 굳이 안 가르쳐도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목숨처럼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주관적인 자기 환상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 대한 인지편향과 우월환상을 통해 자신은 옳고 소중하다고 확신한다. 그러니 자기에 대한 사랑이니 힐링이니 하는 것은 적당히 해도 된다.
...
인권 의식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p.192

우리나라 헌법의 핵심 가치는 자유와 평등이다. 인간은 왜 자유로워야 하고, 왜 평등해야 하는가? 세상에는 모자란 사람도 있고, 못된 사람도 있는데 왜 모두에게 자유를 줘야 하고 모두를 동등하게 대해야 할까? 그건 우리 헌법의 출발점이 '인간의 존엄성'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에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이고, 모두가 평등하며,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헌법은 수많은 글자들의 나열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눈물 흘리기 좋은 감성적인 소재가 아니다.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냉철하고 엄중한 과제이자 요구이다. 존엄한 것은 함부로 대할 수 없고, 훼손될 경우 반드시 응분의 대가가 따라야 한다. 마음대로 짓밟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다. 짓밟힌 것이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간청해야 한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다. 존엄한 것은 두려운 것이고 원시적인 것이다. 지켜지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
하지만 존엄한 것은 양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
슬라보예 지젝은 말했다. "진정 용서하고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응징 혹은 정당한 징벌을 가하는 것이다. 죄인이 적절하게 징벌되고 나서야 나는 앞으로 움직일 수 있고, 그 모든 일과 작별할 수 있다."
p.193-194
- 아이에게 화해를 강요하지 말라


아이도 울고, 엄마도 울고, 실무관도 울고 있었다. 사람은 공감을 하기 때문에 사람인가 보다. 엄마이기 때문에 엄마라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거다. 나는 땀내와 탄내 그리고 어미의 통곡 속에 서 있는 딸아이가 마치 세상을 구원하러 온 구세주처럼 무거워 보였다. 아이는 어미의 죄를 보속하러 온 것이다. 파드득 홰를 치듯 죽어가는 형광등과 소리 없는 눈물과 어깨가 들먹거리는 통곡 속에서 어쩐지 나는 평생을 살아도 세상의 절반도 알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 한복판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보면 수많은 명작들 속에서 갑자기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열차'라는 작품이 불쑥 튀어나온다. 때로는 남루하고 낡은 세상의 침묵이 가장 무거울 때가 있다.
p. 219

욕구와 충동 속에서 사람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존재는 선택이 결정짓는다. 결국 선택이 자아를 만드는 것이다. 가까스로 얼기설기 세운 답은 이 정도이다.
...
'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인간'에 대한 질문과도 같다고 한다. 법 뿐 아니라 모든 인문학이 그럴 것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마 박 여사의 딸처럼 열심히 살다가 남루해지고 낡아가는 것이 정답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내 아이가 커가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답으로부터 멀어져가는 나를 매일 밤마다 목격한다. 그래도 이제는 실망하지 않는다. 한편으론 아빠가 되어가는 것이다.
p. 221
- 산도박장 박 여사의 삼등열차


조지 스타글러도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규제는 시장경제의 결과를 개선해 보편적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파괴할 뿐이며, 경쟁을 제한시켜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분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도한 그느 ㄴ규제란 내생적인데, 이는 규제를 만드는 정책 입안자들이 규제 대상자들에게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며, 결국 규제란 경제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규제는 누군가에게 경쟁을 회피하고 초과이윤을 만들 수 있게 해주며, 이에 따라 그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규제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p. 333
- 새로운 목민관이 아니라 본질적 개혁이 필요하다


미국의 법사학자 로렌스 프리드먼은 "사회는 명백히 원하는 범죄의 양을 스스로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범죄의 양이 많아지면 범죄에 둔감해지고 법을 경시하게 된다. 또한 범죄를 지나치게 많이 원하면 검찰이나 수사기관의 힘이 거대해진다. 그 부작용으로 검사들은 엄청난 업무 강도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관둬라. 검사 일 하고 싶은 사람 줄을 섰다"라거나 "왕관을 원하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은 하지 마시라. 왕관을 써야 하는 것은 국민이다. 그게 헌법 제1조가 말하는 민주공화국이다.
p.378
- 법의 본질


=

기자로 일할 때에 만났던 검사 중 누군가가 검찰을 세상의 하수구에 빗댄 적이 있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자조 섞인 표정에서, 그 표현 자체에서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다.

두툼한 서류뭉치와 끝을 모르는 악다구니, 어쩌면 세상의 하수구 한가운데서도 기어코 사람을 보려는 노력이 돋보여서, 나는 이 책의 작가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책에서 온통 느껴지는 글쓴이는 재치있고 유려하며, 따뜻하고 강인하다.

친구는 반대로 느꼈단다. 정말 다정한데, 차가운 사람 같다고. 그 말에도 공감이 갔다. 세상과 원칙을 향한 그의 입장과 시선은 차가우리만치 단호했으니까. 어쨌든 사명감을 가지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시는 분임은 분명해보여서 존경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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