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륙이 사랑한 도시 이스탄불

멀리 갈라타 탑이 보인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누빌 수 있는 유람선.


'부디 내 인생에 두번째 터키가 있었으면 좋겠다.'
2014년 11월 겨울 휴가를 마치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터키의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한동안 빠져나오기가 힘이 들었다. 수천년의 고도 이스탄불의 왁자지껄한 화려함도 좋았고 어디로 눈을 돌려도 절경 뿐인 카파도키아의 우아한 척박함도 압도적이었다. 새하얗게 반짝이는 파묵칼레에서는 정말 더할 나위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번째 터키는 예상보다 일찍, 뜻밖의 기회로 찾아왔다. 별로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IS 테러니 군부 쿠데타 미수니 해서 온통 국제면을 장식한 뒤였으니까.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고 했다. 그 어느때보다도 헐값에  터키 구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말들도 나오는 때였다.

나의 임무는 만연한 불안을 달랜 뒤 돌아선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터키로 붙잡아매는 일이었다. 갑자기 떨어진 출장에 전후 사정으로 미뤄보아 여러모로 안 가는게 이득이었지만, 오로지 터키라서, 터키이기 때문에 그래도 갔다.

탁심광장. 붉은 깃발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 일이다. 적어야지 적어야지 하던 게 많이 늦어졌다.
내가 다녀간 뒤로 터키는 다사다난한 일을 숱하게 겪었다. IS, 테러, 쿠데타, 새로운 독재.
국제 뉴스로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한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던 이 나라가 생생하게 떠올라 눈이 시렸는데.

내가 다녀오고, 여행 기사를 출고하고, 조금 그 며칠을 잊었을 동안 터키는 꽤나 평온했었다. 그런데 지난주에 다시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인근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면서 국제면 뉴스 거리가 됐다.
더 늦으면 영영 적지 못할 것 같아 뒤늦게 사진을 추려서 아무거라도 적어놓기로 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탁심 광장을 지나가는 엄마와 아이들.
변화 아닌 변화는 눈에 띄게 늘어난 국기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워낙에 이 나라가 국기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생뚱맞은 곳에서 붉은 국기를 마주치는 일이 많기는 했다.
2014년 여행때 한국어를 잘하는 터키인 가이드에게 왜 이렇게 국기가 많냐고 물어보니까  "나라에 대한 자긍심"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심정이 신기하게 느껴져 인상에 남았다.


화관을 파는 가게가 인상적이었는데. 전에 왔을 땐 겨울이라 덜했던 모양이다. 아침 햇살에 빛나던 꽃들.

자긍심이 도시 곳곳에서 뻐드렁치고 있었다. 쿠데타를 미수로 그치게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일까. 정부를 지지한다고 적힌 커다란 현수막도 도심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왠지 히잡 쓴 여인이 더 늘어난 것 같고 총을 든 경찰이 자주 눈에 띄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그런 것도 변화라면 변화일 수 있겠다.


아티스클랄 거리를 따라 달리는 오래된 트램 '튀렐'. 그 위에 기댄 소년이 카메라를 실컷 의식하고 있다.
 사실 두번째 이스탄불이라 전에 안 가본 곳, 특히 아시아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보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술탄아흐메트 지구며, 그 유려한 유적들을 언제 다시 볼 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번이라도 눈에 담아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탁심 광장에서부터 또 아티스클랄 거리를 쭉 따라 내려와 갈라타 탑으로 향했다.

갈라타 탑
 갈라타 탑은 전에 올라가 보지 않은 곳이라 이번에는 올라가볼까 했는데 입장료가 생각보다 너무 비싸서 그러지 않았다.
동행한 선배가 가져온 2012년판 책보다 입장료가 무려 두 배나 비싸졌다고.
선배는 엄청난 물가상승률에 혀를 내두르셨다.
사실 나는 갈라타 탑에서 다리를 따라 쭉 걸어내려가면서 고등어 낙시도 구경하고, 그 밑의 고등어 샌드위치 파는 곳에도 들르고 싶었는데. 동행한 선배들이 힘들어하셔서 마음을 접었다. 사실 꽤 오래 걷긴 했다. 1시간 안팎으로 걸었으니까.

루멜리하사르. 걸어서 접근 가능한 곳 꼭대기에서 보이는 모습. 저 너머로 가지 말라고 막아뒀는데 일행들은 기어코 카메라를 들고 넘어갔다. 나는 게으른데다 덥고 힘들기도 해서 넘어가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향한 곳은 루멜리하사르. 상당히 북쪽에 있는 요새다. 갈라타탑에서 여기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데 택시 기사가 빙빙 돌아 가는 바람에 시간도, 돈도, 감정도 많이 버렸다. 
요새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일품이라고 해서 기대를 잔뜩 품고 갔는데 규정이 바뀌어서 성벽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 금지됐다고 했다. 
사망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참 위태로워 보이긴 했다. 

아야소피아. 맑은 날에 보니 새로웠다.
술탄아흐메트는 확연히 한산했다. 9월이면 이스탄불을 여행하기 최적인 달인데도 겨울비를 맞아야 했던 2014년보다 사람이 적었다.
특히 동양인 관광객을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석양, 보스포러스


나흘간의 이스탄불에서 가장 황홀했던 시간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순항하는 유람선 위에서 맞았다. 이 배를 타기 위해 내가 다시 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좋았다.
배는 갈라타 다리 쪽 선착장에서 타면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1시간 가량을 달린다.
배 위에서 만끽하는 이스탄불의 석양은 말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배를 타는 내내 선박 해양안전이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자유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바다가 거칠지 않아서 그런거 같기는 했는데 척 보기에 왠지 저기 서있으면 안될 것 같은 곳에도 사람이 서있고 그랬다.


이 배 뭔가 귀여운데 잘 펄럭이는 국기가 깜찍함을 더한다.
바다도 바다처럼 예쁘게 나오고 뒤의 도시 모습도 좋아서 맘에 드는 사진.

배 위에서 보이는 돌므바흐체 궁전.

얘는 눈을 씻고 봐도 사람이 없는데 왜 혼자 둥둥 떠있는건지 모르겠다.
베벡은 이스탄불의 청담동 같은 동네 이름이라고. 배를 타고 저기 가서 저녁을 먹었다.


이게 그나마 바닷물 색감이 제일 실제와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이 복잡한 상태였는데 배 위에서 이스탄불의 스카이라인과 새파란 보스포러스 해협의 물결, 그 위로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복잡한 마음이 하찮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한없이 푸르고 아름다워서 스스로가 부끄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배 위에서 무한 반복해 들은 음악은 피터팬컴플렉스의 '너는 나에게' 
청량한 음색과 시원한 기타 소리가 시야만큼이나 마음을 뻥 뚫어 주는 것 같았다. 
가사도 그 순간과 멋드러지게 어울렸다.

너는 나에게 하늘의 천사보다 흰 장미보다 더 아름다워
너는 나에게 보잘것 없는 나에게 밝은 빛이 돼 항상 나를 비추네
나에게 넌 마음속의 아름다운 노래가 되고 내게 나에게 기쁨이 돼 주네
눈물과 슬픔과 아픔은 모두 다 사라져버려 나를 감싸네
네가 힘들어 지쳐 눈물이 날 때 네 곁에 있을게 작은 빛이 돼 줄게


바가지를 쓴 맛집. 알라딘.

지난번에는 못 가본 이집션바자르에 이번에는 들렀다. 향신료 시장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그랜드바자르보다는 조금 작은 대신, 물건이 좀 더 저렴하다고 들었다. 
로쿰을 이 시장에서 사기로 결심했는데 가이드가 데려간 가게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산 것이 화근이었다. 분명 유달이 맛있고 비주얼도 깔끔했는데 1kg에 98리라였던가. 아무튼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한보따리 사고야 말았다. 
바로 이 가게다. 알라딘.

즐비한 로쿰

맛있는데 비싼 알라딘 로쿰

여기가 왜 향신료 시장이라 불리는지 알 법 했던 가게.

전부 다 사들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스카프 가게.
 이집션바자르에서 거둔 가장 큰 수확은 바로 이 스카프 가게다. 지난번에는 이집션 바자르 안으로는 못가고 인근의 좀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점에서 캐시미어 스카프를 샀는데 정말 만족스러웠다. 이 가게는 그때 그 가게보다 더했다. 색감, 문양, 품질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좋아서 눈이 다 뒤집힐 뻔했다. 실은 뒤집혔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거 하나, 내거 하나 좋은 거 사고 아빠랑 동생 막 쓸 거 하나씩 사고 엄마랑 나랑 같이 막 쓸 거 하나. 총 다섯개 샀다. 파산할뻔했다.
터키는 역시 스카프다.


 
뭐 하는 언니들인데 대낮부터 시샤를 빨고 있었는지. 평온해 보여서 보기 좋았다.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터키식 커피. 

터키 커피는 미친듯이 쓰다. 입가심 할만한 로쿰, 물과 함께 서빙해주더라.
 터키커피를 맛본 것도 처음 해본 일. 그러고보니 지난번에 안 해 본게 너무 많아서 큰일날 뻔했다. 터키커피는 쓰디쓰다. 에스프레소와 비슷한 것도 같지만 커피가루가 전부 들어있다는 점에서 또 다르다. 마냥 들이킬수 없다. 가루들이 조금씩 침전될때까지 인내해야한다.
그런 뒤에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마신다. 그 뒤에도 걸쭉한 가루가 진흙처럼 바닥에 남는다. 이걸 가지고 점을 본다고 했다.
다 마신 컵을 받침 위에 엎어뒀다가 뭐 어떻게 보는 거라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봐줄만한 전문가가 없었다.
대신 가이드 무함메드가 야매로 봐 줬다. 결혼을 했는지 묻더니 이스탄불에 다시 와서 결혼할 운명이라는 점괘를 내놨다. 믿거나 말거나. 점괘처럼 다시 올 수는 있었으면 좋겠다.


블루모스크의 신비로운 천장

블루모스크는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내 방으로 옮겨오고 싶을 만큼 하나하나가 어여쁜 타일들.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
그들의 신과 나의 신은 아마도 같을 텐데. 서로 다른 종교로 반목하고, 또 반목하고, 죽고 죽이는 역사.
 한켠에서는 신에게 기도를 하고 맞은편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낯선 사람들이 셔터를 누르기 바쁘다. 야단법석에도 신성함이라는 것이 유지되는 건 사원 자체가 내뿜는 압도적인 기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의 권위 만큼이나 높고, 크고, 화려하게 성당과 교회 사원을 지어야만 한다고 믿은 옛 사람들이 의도했던 것처럼.

술탄아흐메트. 트램이 지나는 시내의 모습.

한결 더 눈에 띄는 경찰들 모습. 아야소피아 성당 앞.

톱카프 궁전
 톱카프 궁전에 들어가 본 것도 좋은 경험. 연일 강행군에 너무 지친 나머지 하이라이트가 되는 건물 내부를 구경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말을 탄 군인들이 톱카프 궁전 내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랜드 바자르. 아가씨, 아줌마, 싸요, 이런 말들이 들리는 곳.

터키 램프는 이번에도 사지 못했다. 꼭 사오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둘 데가 마땅찮았다.
스카프에 너무 지출을 많이 했다는 죄책감도 있었고.
  
전통 공예를 하는 예술가의 손길. 
 터키 전통 미술인 에브루도 구경했다.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마블링 효과를 활용한다.
섬세한 터치를 보고 있으니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속 세밀화가들 이야기가 떠올랐다.

완성된 모습. 세밀한 것에 집착하는 건 타고난 민족성일까.


다녀와서 기사를 써내긴 했는데 첫 문단만 공을 들이고 나머지는 되는대로 휘갈겨 썼다.
미루고 미루다 휴가 가는 전날까지도 다 못쓰는 바람에 아찔하게 닥쳐서 마감한 탓이다.

순간이 아니면 사라지는 감정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늘상 쓰기를 미루고 또 미루게 되는 게으름을 반성한다.


두 대륙이 사랑한 땅, 동·서양 2700년 역사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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