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저녁 - 금강

저녁
- 금강


박준



소멸하는 약력은
나도 부러웠다

풀 죽은 슬픔이
여는 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따라올라가면
은어가 하루처럼 많던 날들이 나온다

저녁 강의 시야(視野)가 그랬다
출발은 하겠는데 계속 돌아왔다

기다리지 않아도 강변에서는
공중에서 죽은 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땅으로 떨어지지도 않은
새의 영혼들이

해를 등지고
다음 생의 이름을
점쳐보는 저녁

당신의 슬픈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빛이 주저앉은 길 위에는
물도 하릴없이 괴어들고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

온통 새하얗고 드넓은 눈밭 위로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극지의 밤,
이불 속에 웅크려 이 시를 읽으면서
눈빛이 주저앉은 길이 어떤 건지, 조금 알 것 같아서 마음이 먹먹했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해피투게더 (1997)

이제니, 별 시대의 아움

박준, 세상 끝 등대 1

2013년 8월 16일 오후 5시 5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2016년 4월 14일 10대 일간지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