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낯선 사랑방과 뜻밖의 대화 2014년 가을이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다코야키를 파는 푸드 트럭이 나타났다. 홍등을 주렁주렁 매단 이 작은 트럭 주인은 삼십대 중반이 될까 말까한 청년이었다. 그는 다코야키 4개를 1000원에 팔았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잊을만하면 한 번씩 트럭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저녁 어스름이면 자리를 정리하는가 싶더니 더러는 매일 해가 넘어간 뒤까지 등을 밝히고 손님을 맞았다. 한 달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내가 스무 해를 보낸 이 동네는 신도시도 구도시도 아닌 서울 외곽의 베드타운이다. 붐비지도 않고 적적하지도 않은 상태로 별다른 변화 없이 늘 조용한 편이다. 그래서 푸드 트럭을 몰고 홀연히 나타나 타코야끼를 파는 젊은 남자는 분명 꽤나 낯선 존재였다. 조금은 아련하기도 했다. 한때 자리를 지키던 달고나, 국화빵 같은 노점상들이 유년의 기억과 함께 자취를 감춘 지도 오래였기 때문이리라. 타코야끼 맛이 특별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말했다. “젊은 사람이 열심인거 같아 눈여겨봤는데 장사가 제법 잘 되는 모양이야.”  장사는 지나치게 잘 됐다. 트럭 앞에는 자주 긴 줄이 늘어섰다. 그보다 눈길을 끄는 건 트럭을 둘러싼 훈기였다. “학원가니? 오늘 늦었네!” 잰 손으로 타코야끼를 만들던 청년이 목청껏 이름을 불렀다.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곁을 지나치던 아이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가 이름을 부르는 아이는 한둘이 아니었다. “여덟 개 해주세요. 10분 뒤에 들를게요.” 장 보러 가던 아주머니 ‘예약’에는 잔뜩 신난 청년의 목소리가 뒤따르기도 했다. 줄을 기다리는 손님들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 장면들이 집으로 향하던 내 발걸음을 때때로 멈추게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트럭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동네 사랑방이 돼 있었다.  그해 겨울이 돼서야 나는 비로소 그 알 수 없는 따듯함의 뿌리를 봤다.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 늦은 오후였다. 청년은 둘 뿐인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여념이 없었다.

2016, 스물여덟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 고린도후서 8:7 But since you excel in everything —in faith, in speech, in knowledge, in complete earnestness  and in the love we have kindled in you  —see that you also excel in this grace of giving. 2 Corinthians 8:7 Mais comme vous abondez en toutes choses:  en foi, et en parole, et en connaissance, et en toute diligence,  et dans votre amour envers nous,  -que vous abondiez aussi dans cette grâce. 2 Corinthiens 8:7 아주 오랜 시간, 엄청난 오해를 했다. 미련한 믿음이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를 둘러보니 원치 않던 방식으로 어른이 돼 있었다. 후회는 없다. 매 순간 나는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다.  그 하루하루의 나 자신 앞에 부끄러움이 없다. 그럼 된 거다. 무언가를 사랑해서 죽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봤다.  이제 용서와 망각만 하면 될 일이다. 그게 지난하고 괴로운 과정이겠지만 나는 끝내 무뎌짐으로서 하나의 우주를 완벽히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새해, 더 무거워지겠다. 쉽게 흔들리지도, 휘둘리지도, 붙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더 단단해지겠다. 쉽게 앓지도, 잃지도, 울지도 않을 것이다. 숱한 거짓 가운데서 참을 가려낼수 있는 지혜를 신께 구할 것이다. 의미있는 일과 가치있는 존재를 곁에 두고 거기 몰두하며 살 것이다.

이병률,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이병률 종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한때는 돌을 잘 다루는 이 되고도 싶었는데 이젠 다 집어치우고 아주 넓은 등 하나를 가져 달(月)도 착란도 내려놓고 기대봤으면 아주 넓고 얼얼한 등이 있어 가끔은 사원처럼 뒤돌아봐도 되겠다 싶은데 오래 울 양으로 강물 다 흘려보내고 손도 바람에 씻어 말리고 내 넓은 등짝에 얼굴을 묻고 한 삼백년 등이 다 닳도록 얼굴을 묻고 종이를 잊고 나무도 돌도 잊고 아주 넓은 등에 기대 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으면 = 착란(錯亂). 그건 1025일간의 착란이었다. 내가 너무 어리고, 미숙하고, 손쉽고, 순진해서, 그래서 열병처럼 겪은 착란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왔다. 모든 지난 날의 실체와, 낯설기만 한 그의 정체와, 그 사이에서 애써 위안하며 외면해온 나의 질병이 까발려졌다. 갑작스러웠으나, 차라리 선물이었다. 청춘의 낭비는 이로써 충분했다.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무의미하게 앓지도, 잃지도, 울지도 않을 것이다.

김사인, 화양연화

화양연화(花樣年華)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못내 영원하지 못하고 져버린 것들에 대한 꾸밈없는 작별인사.

2015년 11월 24일 월요일 10개 일간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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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4일 월요일 10개 일간지 1면 -11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경향신문: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국민일보: 민주화의 巨山 떠나다   ▼동아일보: 닭의 모가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문화일보: '미완의 改革과 통합'  숙제 남기고 가다 ▼서울신문: 민주화 '巨山' 떠나다 ▼세계일보: 민주화 큰 별 지다 ▼조선일보: 大道無門의 승부사 '巨山' 잠들다   ▼중앙일보: "통합과 화합" 승부사 YS 마지막 메시지   ▼한겨레: 민주화 큰산 떠나다 ▼한국일보: 민주화의 긴 여정 맺다 = 사진은 조선 동아가 제일 힘있는 느낌. 제목까지 더하면 조선에 한표.  전반적으로 거산에 집착한 느낌

셀마(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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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마  Selma, 2014 드라마 영국, 미국 128분 2015.07.23 개봉 에바 두버네이 데이빗 오예로워(마틴 루터 킹), 카르멘 에조고(코레타 스콧 킹) We negotiate, we demonstrate, we resist. Our lives are not fully lived if we're not wiling to die for those we love,  for what we believe. We're not asking, we're demanding! Give us the vote! There is no Negro problem.  There is no Southern problem. There is no Northern problem.  There is only an American problem. Glory hallelujah! Glory hallelujah! Glory hallelujah! = 투쟁과 행진, 그리고 승리에 대한 기록.  마틴 루터 킹 한 사람이 이뤄낸 것이 아닌, 용기있는 다수가 한땀한땀 일궈낸 자유의 힘에 박수를 보낸다. 역사는 늘 그렇게 진보했다.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누군가가 거리로 나서고 행진하고, 앞줄에서 당당히 피를 흘리는 이유다. 실제 행진 장면을 보여주는 흑백 화면과 'Glory'의 선율, 마지막 연설 장면에서 데이빗 오예로워가 보여준 열연을 잊지 못할 것이다.  

러브레터(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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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터 Love Letter, 1995 드라마, 멜로/로맨스 일본 117분 2013.11.28 재개봉, 2013.02.14 재개봉, 1999.11.20 개봉 이와이 슌지 나카야마 미호(후지이 이츠키/와타나베 히로코) 그는 나의 연인이었습니다. 당신의 추억을 저에게도 나누어 주세요.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래쉬!   너 바보니? "내 사랑은 남풍을 타고 달려요 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내요. 도서카드에 쓴 이름이 정말 그의 이름일까요?  이 추억은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쑥쓰러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 = 겨울만 되면 첫눈처럼 떠오르는 영화. 오랜만에 봤다. 입원한 마지막 날 밤 침대에서 숨죽이고서. 히로코의 사랑 얘기 같지만 결국엔 히로코를 매개로 이츠키가 첫사랑 그녀 이츠키에게 보내는 연서 같은 영화다. 두 여자는 편지를 통해 이츠키를 추억하면서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성장을 겪는다. 이츠키는 미처 알지 못했던 첫사랑을 되찾고 히로코는 못내 보내지 못했던 숨진 약혼자를 비로소 놓아버릴 수 있게 된다. 독서카드 뒷면을 받아든 이츠키의 표정과 바람, 아마도 남풍에 흔들리는 독서카드 속 앳된 이츠키의 초상은 영영 잊지 못할 장면이다. 죽은 소년으로부터 뒤늦게 도착한 러브레터는 수십년을 거슬러 소녀를 그 시절로 데려다놓았다. 아마 오래도록 때아닌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을 테다. 설원 속에서 빨간 스웨터를 입은 히로코가 무너지듯 오열하며 안부를 묻던 장면 역시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홀로 남겨진 여자는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냐고 한참을 속에서 곪았을 감정을 흰 눈밭에 안부로 수놓았다. 그제서야 새 사랑을 찾아 돌아서는 발걸음의 무게를 감히 가늠하기 힘들다. 두 사람의 감정이 모두 나의 것처럼 가깝게 느껴져서 가슴이 아팠다. 첫사랑에 관한 낭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