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양형 이유,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주영, 김영사 “이 책은 곧 1심 판결문이고, 독자는 당사자이면서 곧 상급심이다. 상급심은 1심의 결론을 받아들여 판결을 인용할 수도 있고, 결론이 틀렸다고 파기할 권한도 있다. 이 책의 독자는 ‘이봐, 당신은 틀렸어. 판사로서의 당신 삶을 파기한다’는 주문을 낼 수도 있고, ‘결론은 용케 맞췄군. 이 판결을 인용한다.’는 주문을 낼 수도 있다. 염치없게도, 이 판결이 일부라도 인용되기를 바라지만, 전부 파기되어도 항소는 없다.  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급심이다.” “법정은 모든 아름다운 구축물을 해체하는 곳이다. 사랑은 맨 먼저 해체되고, 결국 가정도 해체된다. 형사사건에서는 한 인간의 자유를 지지해준 법적 근거마저 해체시킨다. 재산을 나누고, 아이도 나눈다. 사랑의 잔해를 뒤적이고 수습하다 보면 법정이 도축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법관은 굳어버린 사랑을 발라낸 다음 가정을 이분도체, 사분도체로 잘라내고 무두질한다. 법은 날카롭게 벼린 칼이고, 법관은 발골사다.” “보편타당한 원리를 추구하는 사법은 본래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그 바탕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사법의 본령은 삶의 현장과 소통하는 것이며, 대상 사건의 영역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의 문제와 애환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다수자의 지위는 불안정해서 시공과 잣대만 슬쩍 바꿔도 바로 역전된다. 우리는 모두 소수자다. 흑백 인종분리 교육의 부당함을 홀로 지적하며 ‘우리 헌법은 색맹이다 Our constitution is color-blind’라고 일갈한 존 마셜 할란 대법관을 소환할 필요도 없다. 우리 헌법 역시 색맹이고 모든 종류의 차별을 부인한다. 우리 헌법은 남성도, 여성도, 이성애자도, 부자도, 중산층도, 크리스천도, 불자도 아니다.” “나의 존재는 타자에 의해서만 증명된다. 타자는 나를 설명함으로써 내 존재를 입증한다. 나 역시 나와 관계있는 타자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주석이다

빛의 과거, 은희경

빛의 과거 은희경 장편소설 / 문학과지성사 갑자기 큰 소리로 목청껏 뭔가를 외치고 싶었다. 이를테면 명멸, 여로, 폭풍, 쾌활처럼 내가 말하고 싶었으나 말을 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그리고 입안에서 맴돌다 사라져버린 수많은 나의 말들. 환희, 명랑, 축복, 낙원, 영원. 하지만 그래봤자 이 옥상의 어둠과 이불의 장막 뒤에 숨어서 혼자 외치는 것뿐이었다. 누구의 귀에도 다가갈 수 없는 말들이었다.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약점은 연약한 부분이라 당연히 상처 입기 쉽다. 상처받는 부위가 예민해지고 거기에서 방어를 위한 촉수가 뻗어 나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이 어떻게 취급당하는가를 통해 세상을 읽는 영역이 있다. 약점이 세상을 정찰하기 위한 레이더가 되는 셈이다. ...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나를 조종하고 휘두를 힘을 가진다. 우리는 장점의 도움으로 성취를 얻지만 약점의 만류로 인해 진정 원하던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긴다. 어쩔 수 없이 약점은 삶의 결핍과 박탈을 관장한다. 약자는 위로받기보다 차별이 없는 존중을 원한다. 결점이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특별한 배려를 받는 게 아니라, 다수와는 다른 조건을 가졌을 뿐 동등한 존재로서의 권리를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맞은편 대열에서 응원을 보내기보다는 내 곁으로 와서 서는 것. “참되고 아름다운 문학은 작가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선 채로 서문을 세 번쯤 읽고 나서 그 책을 샀다. ‘참되고 아름다운’이란 표현 속에 깃든 씩씩한 희망과 순정함이 웬일인지 내 마음을 조금 아프게 만들었다. P.233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 P. 281 = 불안전하고 뜨거웠던 시간을 돌아보는 애틋함

2019, 올해의 시상식

2019 올해의 시상식 딱 하나를 고를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곤란해서다. 하나만 고르기엔 좋은 것들이 숱하다.   그럼에도 시도해본다. 나만의 시상식. 내 삶의 세번째 10년을 지나보낸, 2019년 한해를 조금 특별하게 매듭짓기 위해서다.  제때를 맞춰 사랑한 것들과, 뒤늦게 접하고 사랑에 빠진 것들을 각각 골랐다.  시 - 올해 작품: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 남겨진 것 이후에 , 문학과지성사 - 예전 작품: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 불취불귀 , 문학과지성사 소설 - 올해 작품: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문학동네 - 예전 작품: 김금희, <경애의 마음> , 창비 비문학 - 올해 작품: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 문학동네 - 예전 작품: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 민음사 영화 - 올해 작품: 봉준호, <기생충> - 예전 작품: 쿠엔틴 타란티노, <펄프픽션> 드라마 - 올해 작품: 이병헌, <멜로가 체질>, JTBC - 예전 작품: 응답하라 1997, TVN 음악 - 올해 작품: 잔나비, <전설> -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 예전 작품: Aerosmith, , I Don’t Want To Miss A Thing 공연 및 전시 매튜 본, <백조의 호수> 여행지 아이슬란드 바트나요쿨 빙하

허수경, 공터의 사랑

공터의 사랑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 공터에 무지개를 띄우고, 잊었던 꿈을 앓는 일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 열림원 그런데 그 외 나머지 말, 나머지 기억, 나머지 내 봄, 내 어둠, 당신의 계절은 모두 어디 갔을까. 어쩌면 그것들은 영영 사라진 게 아니라 라디오 전파처럼 에너지 형태로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다 드물게 주파수가 맞는 누군가의 가슴에 무사히 안착하고, 어긋나고, 보다 많은 경우 버려지고, 어느 때는 이렇게 최초 송출지로 돌아와 보낸 이의 이름을 다시 묻는 건지도. p.43 그 문학은 하나의 선을 편드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 막 사람들 앞에 선 당선자의 허영, 그 헛폼 안에서조차 삶의 이면을 비출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손들어주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문학이었다. 그 팔 안에서 나는 여전히 실수하고, 깨닫고, 배우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전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어리석어, 같은 실수를 다시 하며 살아간다. 말과 글의 힘 중 하나는 뭔가 '그럴' 때, 다만 '그렇다'라고만 말해도 마음이 괜찮아지는 신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팔이 많아 아름다운 문학을 이따금 상상하며 말이다. p.52 아는 이야기를 다 쓰면 그 다음엔 어떤 글을 지어야 하나 근심한 적이 있다. 바보같이 몸도 글도 한결같을 거라 생각하던 때의 일이다. 단어 하나가 몸을 완전히 통과한 후에는 그 전과 전혀 다른 뜻이 된다는 걸 몰랐다. 안다고 믿었던 말, 쉽게 끄덕인 말, 남몰래 버린 말....... 스러진 푯말을 따라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갈 때면 이따금 몹시 늙은 얼굴을 한 서사들이 멀찍이서 손짓하며 서 있기도 했다. p.124 언젠가 두보가 쓴 저 <곡강>을 두고 학생들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고. 문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봄이 아닌 여러 개의 봄을 만들어주며 이 세계를 더 풍요롭게 감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

버스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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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날개로 날아와 한동안 머물던 너를 버스에 데리고 탈 수는 없어서 황급히 쫓아보냈네 여름이 끝나버렸네 2019. 08. 31.

이장욱,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이장욱 무섭다 결국 그곳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섭다 마음이 무섭고 몸이 무섭고 싹 트고 잎 피고 언제나 저절로 흐드러지다가 바람 불어 지는 내 마음속 꽃잎 꽃잎, 그대가 무섭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하나의 고요한 세상을 지니고 있으니, 무섭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끄는 매혹에 최선을 다해 복종하였으므로 내 고요한 세상에 피고 지는 아름다운 모반을 주시하였다 그대가 처연히 휘날려 내 몸과 마음이 어지러울 때 단 한번도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흘러가는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기억을 만나면 기억을 죽이고 불안을 만나면 불안을 죽이고, 그러므로 이제 이 눈과 코와 입과 귀를 막아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시길 그대에게 익숙한 세상으로 나를 인도하여 그대 몸과 마음에 피고 지는 싹과 잎과 꽃이 되게 하시길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이 고요한 세상을 처연히 흩날리도록, 내 몸과 마음의 꽃잎 꽃잎 피고 지는 그곳에 기다리는 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이장욱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의 시 111 = 이미 흐드러진 마음을 지키기 위해 의심 없이 흔들림 없이 기억과 불안을 죽이며 견디는 것. 나약하나 고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