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열병/신춘시즌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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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12월 19일] 신춘시즌 단상

한국일보 | 백가흠 소설가 | 입력 2013.12.18 21:03

신춘시즌이 지나가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 당선자들에게는 개별통보가 갖거나 마감이 늦었던 곳은 속속 당선자들이 가려지고 있을 것이다. 허나 아직도 응모자들은 간절하게 연락을 기다리며 올해 신춘문예의 주인공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다. 또 한편으론 낙선에 대한 불안한 걱정도 늘어갈 것이다. 문청에게 신춘문예는 어쨌든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일이고, 문학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다시 깨닫는 순간이다.

올해에도 나는 한 곳의 예심을 맡았다. 셋이서 수 백 편이 넘는 응모작을 하루 만에 읽고 본심에 올릴 작품을 고른다는 것이 어쩜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응모를 한 사람들은 그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허나 온종일 본심에 올릴 두 세편을 가려내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당선자는 한 명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내게 할당된 작품에서도 당선, 단 하나의 작품만 고르면 되는 일인데, 그 작품은 대개 눈에 확 들어오기 마련이다. 1차로 정독할 작품을 추린다. 그 말은 떨어뜨릴 작품을 고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 작품량은 10분의 1로 줄어든다. 다음, 거른 작품을 정독한 후 각자 두세 편을 본심에 올리는 방식을 취한다. 예심을 하며 작품 모두를 끝까지 정독할 수는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럴 이유도 없다. 대개는 도입부분과 결말을 보는데 그곳에 응모자의 글쓰기 수준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응모자들이 그렇게 소설을 읽고 어떻게 소설의 진위를 가려내겠느냐 묻는다면, 가려낼 수 있다고 난 자신할 수 있다. 신춘문예는 단 한 명의 당선자만 가려내면 되는 일이고 그것은 본심 위원들이 할 일이니 그렇다. 신춘문예가 일종의 백일장과 같은 형식이니 이해 못할 것도 없는 일이다. 심사위원들의 졸음을 몰아내고, 힘든 시간을 쫓아내는 작품이 분명 존재한다. 소설 읽는 재미에 푹 빠지게 만드는 그 소설, 바로 당선을 눈앞에 둔 작품이다.

오후가 되면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한다. 익숙한 이름과 대면하고부터 그렇다. 이번에도 나는 망각의 저편에 자리 잡고 있었던 여러 명과 해후했다. 대학동창이나 가깝게 지내던 선후배들, 그리고 소식이 끊긴 제자들의 소설과 마주함이란 직접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민망한 마음이 먼저 앞서곤 한다. 소설보다도 맨 앞장의 주소와 연락처를 보며 문득 지금은 무엇을 하고 살까, 이 친구는 왜 이곳에서 사는 걸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부터 다른 작품과는 달리 꼼꼼하게 읽어내려 간다. 대부분 소설은 별로이거나 꽝이다. 나는 왜 그런지 알고 있다. 소설을 가을에만 쓰기 때문이다. 굉장히 마음 시린 일이다. 그들은 왜 가을이면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지 나는 알고 있다. 그러면 변변치 않는 소설을 원망해 보기도 한다. 문학의 열병을 앓아본 사람이라면 찬바람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서 겨울의 문턱에 이는 쓸쓸함이 얼마나 사람의 심정을 멍들게 하는지 알 것이다. 문득 일상을 되돌아보며 내가 잘 살고 있는 게 맞는지,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하는 물음 앞에 당황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소설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동기이다. 문학, 신춘문예는 그렇게 일상에서 멀어지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직접적인 인연은 없으나 응모한 사람들의 마음이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나는 탈락박스에 던져놓은 작품을 다시 꺼내어 뒤적인다. 혹시 내가 실수해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인다. 글쓰기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누구든 글을 쓰라면 열심히 잘 쓰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렇다. 나는 낙선도 해봤고 당선도 해봤으니 한 말씀하자면, 문학은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쓰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춘문예는 '어떻게'의 한 과정임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그러니 실망할 것도 낙담할 일도 없다. 문학과 숙명적 관계를 확신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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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열병을 앓아본 사람이 느끼는 이 계절이 스산하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잘 가고 있는가. 
계절에 멍든 심장을 움켜쥐고 감히 신춘문예에 도전해봤던 나의 지난 패기가 문득 그리워진다.
문학과 나의 숙명적 관계를 길게 내다보며 확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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