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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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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와 '여성' 한겨레 강남역 살인사건이 뜻밖의 양상으로 치닫고있다. 뚯밖이 아니라 어쩌면 예견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으로 본격화된 여혐, 여혐혐, 남혐 등이 음지라면 음지일 온라인상에서 폭발적으로 과열되면서 분출구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회원들, 극성 페미니스트들의 논쟁이 아니라 모든 여성 개개인이 짊어진 문제라는 점을 상기할만 계기가 있어야했다. 이 기형적인 젠더 담론이 액션으로 체화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다음 단계'였다. 이 단계를 겪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매우 흥미롭다. 평소 유보해왔던 '여성주의'나 '젠더'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기엔 아주 알맞은 때라는 확신이 생겨 되는대로 정리해본다. 우선 그동안 용어의 모호함이 갈등을 증폭시켜왔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논쟁의 한가운데 선 단어는 '여성혐오 (여혐)'이다. 우리말 '혐오'가 주는 특유의 의미에다가 일베와 메갈리아의 대결 구도 속에서 '여혐'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본래 뜻보다도 거북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많은 부분이 생략되고 함축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건을 다루면서만큼은 ' Misogyny '라는 영어 단어로 대신해봤으면 한다. Misogyny는 여성에 대한 혐오, 증오는 물론 차별, 비하같은 보다 넓은 범위의 개념을 내포한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대하지 않고 객체로 여기는데서 비롯되는 모든 불합리와 사소한 습관,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폭력, 가부장주의 등이 모두 해당한다. "'김여사'가 차를 몰고 나왔다", "어디 여자가 함부로 나서", "선머슴같고 여성스럽지 못해", "조신하지 못한 옷차림을 하면 성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당연히 딸이 해야지", &q

엄마가 된다는 것

엄마가 된다는 것 아이들이 있었다. 열두살 난 소년부터 서너살배기 꼬마까지 네 명. 아버지가 다른 남매들이다. 그들의 존재는 비밀 그 자체다. 공식적으로 태어난 적이 없어서다. 사랑이 끝나고 짐짝처럼 아이가 남겨지는 일이 반복됐다. 혼인신고도, 출생신고도 없이 남자들이 떠난 뒤 남은 엄마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거짓말 뿐이었다. 그녀는 비밀리에 꽁꽁 감춰 아이들을 길러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가족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엄마가 편지와 약간의 돈만 남긴채 아이들을 떠나면서부터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돌아오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두려웠고 외로웠고 배고팠고 힘겨웠지만 저마다의 동심을 발휘하며 끝까지 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세상을 견디기에는 그 노력이 너무 연약했던걸까. 결국 막내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4년작 영화 '아무도 모른다' 얘기다. 먹먹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엔딩크레딧이 끝나고 정지된 화면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복잡한 심경을 굳이 한갈래로 정리하면 '충격'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화'가 있었고 그게 영화보다 더했다는 사실이 충격을 배가시켰다. 1988년 도쿄에서 발생한 ‘스가모 어린이 방치 사건’. 엄마가 비밀리에 기르던 아이들 중 차남이 병사했는데 출생신고되지 않은 아이에 대한 매장 허가가 나올 리 없었다. 그녀는 죽은 아이를 비닐에 싸서 악취제거제와 함께 벽장 속에 넣었다. 그걸 보고 자란 장남이 훗날 죽은 동생을 비슷하게 암매장했다가 적발된다. 이 가족은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여러 감정이 뒤엉킨 충격은 불안으로 구체화됐다. 모성이 본능은 아닐지도 모른다는데서 시작된 불안이었다. 낯설지는 않았다. 수년전 린 램지의 영화 '케빈에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2011)'를 봤을 때도 한차례 겪었으니까. 우리는 알게모르게 모성애가 여성에게 내재된 본능적인

채식주의자, 한강

채식주의자 한강/창비 ".....꿈을 꿨어."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p.14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p.43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책임의 관성으로, 차마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p.64 -채식주의자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어졌다. 그는 더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 앞으로 오랫동안 자신이 작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는 그때 했다. 단 한순간에 그는 지쳤고, 삶이 넌더리났고, 삶을 닮은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 p.83-84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앞뒤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자장가 삼아, 그는 끝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듯 잠들었다.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p.143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

곡성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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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哭聲) THE WAILING, 2016 미스터리 ,  스릴러 ,  드라마 한국 156분 2016 .05.11  개봉 나홍진 곽도원 (종구),  황정민 (일광),  쿠니무라 준 (외지인), 천우희(무명) 그들은 놀라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누가복음 24장 37~39절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지랄이여 지랄이. 왜 하필 자네 딸이냐고? 그 어린 것이 뭔 죄가 있다고? 자네는 낚시할 적에 뭐가 걸릴 건지 알고 미끼를 던지는가? 그놈은 미끼를 던진 것이여, 자네 딸은 그 미끼를 확 물어분 것이고. 절대 현혹되지 마소. 미끼를 삼켜버렸네. 너는 네 의심을 확인하러 왔다. 말해도 믿지 않을 거다.  내가 악마가 아니면 내러간다고 했나? 내려가는 건 네 의지가 아니다. 오 주여.  네 딸의 애비가 죄를 지었어. 남을 의심하고, 죽일라카고, 결국 죽였어.  쩌 집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가면 다 죽어. 인자 두 번 남았어. 가지마 제발! = 사람들이 영화로 얻고자 하는 바는 제각기 다르다. 이 영화를 두고 자극적이고 오싹한 공포를 기대했다면, 권선징악 끝의 통쾌함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웠 것이다. 만족감을 느끼는 쪽은 뭔가 고민하고, 곱씹고, 생각하게 하는 뒷통수 한방을 원했던 사람들이다. 내가 그랬다. 마지막 장면에서 엔딩 크레딧으로 넘어가는 순간 평론가들의 만점 행진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주요 인물들의 정체를

STRATFORD-UPON-AVON: 언어의 연금술사 셰익스피어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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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TFORD-UPON-AVON:  언어의 연금술사 셰익스피어의 고향 이번 출장에 유독 들떴던 건, 어쩌다보니 셰익스피어 400주년 기념일인 4월 23일에 맞춰 도착하는 것으로 일정이 맞물렸기 때문이었다. 그 축제의 한복판에 내가 있을수 있다니!  하는 생각에 신이 났다.  물론 400주년 당일 저녁에서야 런던에 떨어지는 바람에 가장 화려한 하루를 듬뿍 만끽하지는 못했지만 뭐 그런대로 좋은 스케줄이었다.  관광안내소 입구에 설치된 간판! 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아름다운 마을임은 틀림없었다.  도착한 첫날은 호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짐을 풀고 템스강변을 따라 셰익스피어 관련 설치예술을 감상하려던 계획은 물건너갔다.  런던 빅토리아 역 5분 거리 탑햄스 호텔 TOPHAMS HOTEL 절대 가면 안되는 악의 구렁텅이 같은 곳이다. 극악무도한 가족경영자들이 선량하고 어수룩한 여행자를 골라 등을 쳐먹는 구조로 운영된다. 우선 도착하면 예약당시와 다른 인근 건물로 안내하는데 같은 호텔이라고는 하지만 이름도 분명히 다르고 시설은 눈뜨고보기 힘들 정도로 형편없다. 전구 안들어오고 물 안나오고 딱 봐도 누추한 뭐 그런.. 여기서 강하게 항의하지 않으면 호구잡혀서 계속 거기 자는 거다. 다행히 잽싸게 관련 후기를 찾아보고 바로 항의했더니 오버부킹돼서 어쩔수 없었다며 다음날 방을 바꿔준다고 했다.  그 좁고 후진 방에서 BBC2에서 해주는 생중계를 봤다.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븐의 로열셰익스피어극장에서 그야말로 성대한 축제가 펼쳐지고 있었다.  한때 열병을 앓았던 데이비드 테넌트가 캐서린 테이트와 함께 사회를 봤고 이언 매켈런, 주디덴치,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그동안 셰익스피어극에서 주연을 맡았던 내로라하는 영국 배우들이 전부 무대에 올라 명장면을 재현했다. 찰스 왕세자 등 왕족까지 총출동해 자리를 빛냈다.  이걸 피곤을 무릅쓰고 감격하면서 봤다. 내가 이걸 생방으로 보고있다니!!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