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채식주의자

한강/창비



".....꿈을 꿨어."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p.14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p.43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책임의 관성으로, 차마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p.64

-채식주의자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어졌다. 그는 더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
앞으로 오랫동안 자신이 작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는 그때 했다. 단 한순간에 그는 지쳤고, 삶이 넌더리났고, 삶을 닮은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
p.83-84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앞뒤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자장가 삼아, 그는 끝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듯 잠들었다.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p.143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ㄴ시선이었다.
p.146

-몽고반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런 순간에, 이따금 그녀는 자신에게 묻는다.
언제부터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을까. 아니, 무너지기 시작했을까.
.......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p.165-166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p.169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 나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어떻게 생각을 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영혜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p.186-187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p.203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p.204

-나무 불꽃



=

이 무시무시한 소설이 결국 맨부커상을 거머쥐었다. 쇼트리스트에 들어간 다음에서야 부랴부랴 읽었는데 잘한 일이었다. 지금은 품귀 현상까지 빚고 있으니까. 나 역시 뒤늦게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반성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익히 들어온 작가였는데 입사 후에 워낙에 책을 안 읽었고, 편협하게 한국 문학을 읽었다.

강렬한 소설이었다. 2016년 4월 9일, 강남역 교보문고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기운이 모조리 끝없는 지하로 빨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보기 드문 순수문학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영혜의 채식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가장 결연한 거부였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나무가 되는 것.
마음 속의 자잘한 돌기들을 소르르 일으킨 건 세번째 이야기 '나무 불꽃'이다.
인혜가 삶을 붙들어 매는 방식은 영혜가 삶을 놓는 방식과도 닮아있었다. 그만큼 필사적이었고, 쓸쓸했고, 아팠다.
그녀의 말처럼 미치기는 생각보다 쉬운 건지도 모른다.
미친 것은 과연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광기의 세상에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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