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2016)


곡성(哭聲)

THE WAILING, 2016









곽도원(종구), 황정민(일광), 쿠니무라 준(외지인), 천우희(무명)










그들은 놀라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누가복음 24장 37~39절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지랄이여 지랄이.



왜 하필 자네 딸이냐고? 그 어린 것이 뭔 죄가 있다고? 자네는 낚시할 적에 뭐가 걸릴 건지 알고 미끼를 던지는가? 그놈은 미끼를 던진 것이여, 자네 딸은 그 미끼를 확 물어분 것이고.



절대 현혹되지 마소.



미끼를 삼켜버렸네.



너는 네 의심을 확인하러 왔다. 말해도 믿지 않을 거다. 
내가 악마가 아니면 내러간다고 했나? 내려가는 건 네 의지가 아니다.

오 주여. 



네 딸의 애비가 죄를 지었어. 남을 의심하고, 죽일라카고, 결국 죽였어. 



쩌 집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가면 다 죽어. 인자 두 번 남았어. 가지마 제발!



=

사람들이 영화로 얻고자 하는 바는 제각기 다르다. 이 영화를 두고 자극적이고 오싹한 공포를 기대했다면, 권선징악 끝의 통쾌함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웠 것이다. 만족감을 느끼는 쪽은 뭔가 고민하고, 곱씹고, 생각하게 하는 뒷통수 한방을 원했던 사람들이다. 내가 그랬다. 마지막 장면에서 엔딩 크레딧으로 넘어가는 순간 평론가들의 만점 행진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주요 인물들의 정체를 다 스포일 당한 뒤에 봤는데도 그랬다.

여러번 곱씹고 이런저런 글들을 두루 읽은 뒤에야 떠오르는 잡념들을 모조리 적어보고자 한다.

영화는 믿음과 의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뻔하고 상투적인 이 소재를 버무리는 방식이 절묘하다. 나홍진 감독은 독실한 크리스찬이라고 했다. 고민이 묻어나는 대목이 자주 눈에 띄었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무명', 천우희다. 그녀는 예수를 상징한다. 절대자의 대리자, 영적이자 육적인 존재, 신의 섭리로 인도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제하지는 않는다. 귀신인듯 사람인듯 별안간 나타나 "할매가 그러는디~"로 시작하는 기괴한 말을 전한다. 그녀가 전한 말을 믿었어야 하는 건지, 의심했어야 하는 건지는 영화가 끝날 때가 돼서야 확실해진다. 절대자는 분명 메세지를 줬는데 인간은 들을 줄을 모른다. 나를 비롯해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늘 반신반의하고 두려워하는 상황이다. 간절히 신에게 기댈 때 조차도 들을 줄 모르고, 알아챌 줄 모르는 인간의 무기력함.

신의 메시지는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분명히 베드로의 의심을 모티브로 따온 "쩌 집 닭이 세번 울기 전"이라는 대사까지 나왔는데도, 천우희가 직접 곽도원의 손을 잡음으로써 영이자 육인 '예수'의 상징이 구체화됐는데도, 이 장면을 통해 오프닝 크레딧이 수미쌍관을 이뤘는데도. 관객들은 끝까지 혼란스럽다. 흔들린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 의지로 파멸한다.

의외로 이 다음, 주인공들보다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인물은 부제인 이삼과 잠깐 등장하는 신부. 신부는 현혹된 종구를 의사 말을 들으라며 돌려보낸다. 반면 마음 속에 의심이 남은 이삼은 스스로 '악의 소굴'로 걸어 들어간다. 확인하고 실증하려 드는 인간의 '호기심'은 죄로 돌아온다. 분명히 일본인이 죽는 걸 봤는데도 악마로 부활한 일본인의 육신에 대고 정체를 묻는다. '사람'이라고 하면 돌아가겠다고도 한다. 그런 이삼을 비웃듯이 악마는 오프닝 크레딧의 성경 구절을 읖으며 사진을 찍는다.

감독은 처음부터 정답을 관객에게 쥐어 주고 영화를 시작했다. '현혹되지 말라'는 포스터 문구부터 오프닝 크레딧, 황정민이 들고 있는 카메라까지. 그런데도 관객들은 신나게 휘둘리고 어안이 벙벙한 채 엔딩 크레딧에 도달한다. 영리한 편집 때문이다. 의도적인 연출과 교차 편집 사이에서 관객은 길을 잃는다. 영화라는 예술의 기술적인 특징을 십분 활용한 장난이다.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서사다. 영화가 열린 텍스트여서 관객과 상호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빚어낼 수 있는 수작이다. 고작 두시간 반 짜리 영화 안에서 관객은, 인간은 다 알고도 현혹될 정도로 나약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과 '믿음' 키워드보다 자꾸 곱씹게 되는 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무명 앞에서 절규하는 종구의 목소리다. 의심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라는 절대자의 답이 돌아오지만 여전히 납득하긴 힘들다. 욥기의 욥이 떠오른다. 무엇이 먼저인 걸까. 다가온 시련이 먼저인지, 죄가 먼저인지, 모든게 신의 계획 안에 설계된 추락인지. 인간은 도무지 알기가 힘들다. 욥은 신과 악마의 내기 사이에서 파멸에 이르는 무고한 피해자다. 종구도 그랬다. 다만 욥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신의 품으로 돌아갔고, 종구는 닭이 세번 울기 전에 신을 져버린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불쾌함이 극에 달하는 건 죽은 뒤에야 비로소 부활해 절대악이 된 '일본인'이 예수의 모습을 보이는 장면에 이르러서다. 시각차에서 오는 미묘한 감정이다. 단지 나약한 인간의 믿음에 대한 악마의 '조롱'으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감독은 '의심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끝없이 인간을 시험에 빠뜨리는 신이 사실 악마와 다를 바 없다는 존재라고, 애증이 담긴 삿대질을 하고 있는 건가. 이삼이 부르는 '주여'는 탄식인가, 메시야 앞의 고백인가. 종구는 실패한 욥이고 악마는 신과의 내기에서 이긴 것인가.

여러가지가 열려 있다. 영화가 끝난 뒤에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많은 생각이 피어오르고 그 속에서 스스로 현혹된다. 감독이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뜻일 테다.

현실의 모든 부조리함, 괴로움, 고통, 시련들이 닭이 세번 울기까지 기다리면, 믿음을 지킨다면, 한낱 악몽으로 여겨 벗어날 수 있는 허상이라면 정말 좋겠다. 신이 내게도 닭 울음소리 세 번을 기다릴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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