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스피드, 김봉곤

여름, 스피드

김봉곤 / 문학동네


<컬리지 포크>

나는 더이상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실은 나를 자격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힘이 없다. 그 사실에 더 피로하고 울적해졌다.
p.13

그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고 틀릴 거라면 예감하지 않았다.
p.35

기억할 필요가 없었던 나날들에 대해 기억해야 할 순간이 왔다.
기억할 필요가 없었던 날들은 쓰지 않아도 되는 날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잠시 후 쓰지 않으면 살지 않았다, 고 말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건 비약이었다. 쓰지 않으면 살지 않았다고 말해버리는 건 어쩐지 내 삶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를 절하하는 건 얼마든 좋았지만 내 삶을 할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쓰지 않으면 살지 않았다고 한번쯤 우겨보고 싶었다.
...
나는 지난 몇 달간의 기억을 되살리며 글을 쓸 것이다. 이제 와서 그들처럼 쓸 수 없었지만, 그들만큼 아름답고 싶었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서는 왜 배길 수 없는 것인지, 무언의 안온함을 왜 견딜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이제는 말할 것이다. 도리 없이 지체 없이. 내가 가진 모든 패를 다 보여주지 않고서는 시작할 수 없다. 그건 페어한 게임도 나의 방식도 아니었다. 부디 나보다 나의 글이 더 진실할 수 있기를. 그의 뒷모습을 생각하면, 조금 더 그럴 수 있는 기분이 되었다.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
p.48-49


<여름, 스피드>

그러고는 계속해서 걸었다. 비척비척하면서, 시시덕거리면서, 손을 고쳐 쥐면서 걸었다. 또 너한테 말리는구나. 헷갈리게 흘리는 거 여전하네. 그렇지만 밤의 맥박으로 뚜벅뚜벅.
p.85

영우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건 오직 한 사람이 날 거부한 것이었지만 나는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건 잘 구별이 되지 않을까. 그 마음이 나를 괴물로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애써 구별하지 않았을까.
p.90


<라스트 러브 송>

정말 좋았다. 그게 내 기쁨이었다. 매분 매초, 이제껏 나를 가려왔던-내가 가려왔던 베일을 벗고 선명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면을 발견하고 조명하는 것. 그건 다시 한번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나는 언제나 더 많이 살고 싶어했으므로 그건 내게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p.132

사랑에서 깨든 잠에서 깨든 둘 중 하나만은 하게 해달라고 빌어보지만, 둘 다 잘, 아니 아에 하나도, 도무지 되지를 않는다. 나는 이제 명령한다. 제발 기억하라고.
p.140

타인의 삶을 천천히 음미할 수 없을 것이란 불안과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누군가를 한입 가득 집어넣고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짓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것이 쓰든 달든 아주아주 천천히. 이번에는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성급하게 미래를 맛보는 짓을 이번에는 안 한 것 같은데.
p.142




어쩌면 사랑은 영언히 정의되지 못한 채 부유하며 말할 수 없음, 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것을 느꼈다, 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소설가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책 한 권을 써내며, 음악가는 선문답처럼 음악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춤을 추며 투박해지는 것에 저항한다.
p.187

사랑에 문맹이 있다면 그였고, 배우지 못한 게 있으면 내가 가르쳐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p.202



=

하지 않은 사랑을 끝낸 기분이 들게 하는 글들이었다. 모든 문장이 진솔하게 느껴져서 한없이 빨려드는 것만 같았다. 쉬이 잠 오지 않는 여름 밤과 퍽 어울렸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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